자기만의 책상과 정부 지원금

2602 여섯 번째 열쇠 : 돌고 돌아 책상 앞

by 송무난

설 연휴에 미리 써둔 글이 있었다. 『자기만의 방』을 읽고 새로운 500파운드를 기대하며 사업계획서를 붙들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때는 그게 2월의 전부인 줄 알았지. 3월이 된 지금, 글을 열고 컨트롤 A를 누른다. 싹 다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적는다.


수포자 예체능 인간이 마음으로 빚어낸 무나니스트를 비즈니스의 언어로 풀어쓰려니 지레 겁부터 났다. 아이템 개요, 개발 동기, 차별성, 목표 시장을 지나 사업화의 페이지에 들어서자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매일 아침 일어나 작성 중인 한글 파일을 열어보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그렇게 또 책상에 영 앉기 싫던 어느 날, 영화 '컨택트'에서 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꺼번에 바라보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만난다. 슬픈 결말까지 전부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는 주인공. 돌아가는 길까지도 이미 포함된 경로라면, 꼭 직선이 아니더라도 안전하다는 감각을 살짝 알 것도 같았다. 오래 기억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홀라당 까먹어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처음으로 신점을 봤다. 다 잘될 거라는 얘기를 듣고 안심했다. 스스로 믿기를 선택하면 돼,라고 계속 외치면서도 결국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야 마음이 놓인다. "당신은 장사치는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는 건 역시 빈틈에 대한 이야기다. 조심해야 할 것이 모르고 있던 새로운 위험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구멍이라서 다행이다.


참선 전문과정을 등록할까, 마케팅이나 콘텐츠 제작 공부를 해볼까 고민하고 있었다. "미루는 걸 조심하세요!" 하는 법사님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이제는 그만 돌아보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질끈 눈 감고 진도를 나가야지. 또 같은 결론을 내려본다. 식빵아, 또 의심해서 미안해, 너는 언제나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는데... 지겹겠지만 나는 아마도 이 짓을 끝없이 반복할 거란다. 당분간은 공부로 도망가지 않기로 한다.


명절 전까지는 외출 일정을 만들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방 밖에서 서성인 시간이 길었다. 그럼에도 머릿속은 줄곧 무나니스트로 가득했다. 만나는 모든 게 힌트처럼 보였다. 어쩌면 돋보기를 들고 찾아다녔던 것 같기도 하다.


밤이면 항상 꾸역꾸역 책상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억지로 의자에 몸을 밀어 넣으면 그 무섭던 페이지가 어찌어찌 써진다. 진도를 나가고 있는 동안은 오히려 어느 때보다 평온하다. 망설임과 두려움을 없앤 게 아니고 그저 방석 깔고 앉았을 뿐인데. 신기해라.


계획 세우고 업체를 찾고 견적을 받는 과정은 회사에서 언제나 하던 일이지만, 소속 없이 더군다나 아직 사업자도 없는 상태로 진행하는 건 마치 벌거벗고 출근하는 기분이었다. 겨우 용기 내서 예전에 연이 있던 사장님께 전화를 했다가 한참 걱정의 잔소리를 들었던 날은 회복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모두가 처음부터 1,000개 만드는 건 아니지 않나? 다들 시작은 있었을 거잖아? 그래도 작은 수량의 견적을 내주는 업체를 겨우 몇 군데 찾아내며 사업계획서의 끝 페이지들을 채워나갔다.


올해 혁신 소상공인 창업 지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던 신창사를 매일 검색하며 기다렸지만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관련 부서에 전화를 하니 2월 말에는 꼭 공고가 올라올 거라고 했다. 그 뒤로 조마조마하며 준비하고 있었는데, 2월 27일 금요일에도 사이트가 조용했다. 다시 전화를 하니 뉴스에 나오던 '모두의 창업'으로 통합되어 3월 말에나 올라온단다. 통화한 담당자는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사전 공고를 보니 신창사와는 결이 많이 달라 보인다. 멘붕과 자책이 PMS를 만나며 폭풍의 연휴를 보냈다. 원래도 가망이 없던 예창패를 서류라도 내볼까? 슈퍼스타 K인지 모두의 창업인지 뭔지도 모르겠는데 어떤 준비를 해야 되나? 회오리 속에서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이 글을 쓰고 있다.


분명 처음에는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무나니스트의 빈틈을 사업계획서로 차곡차곡 다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준비를 하다 보니 자꾸만 지원금이 목적이 되고, 타임라인도 그 일정에 맞춰졌다. 지원 사업은 해가 바뀌면 내용이 달라질 수 있고, 정부가 바뀌었으니 변화가 있을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흔들리지? 한심해하다가 이 시점에 자책은 약간의 도움도 되지 않음을 애써 떠올려본다. 속상한 애 한 대 더 줘패기를 멈추고, 엉켜버린 고민을 잠깐 스톱한 채 책상 한쪽으로 밀어 두기로 한다.


진즉 제작해 놓고도 사업계획서에 매달리느라 출시하지 못했던 신제품들을 얼른 아이디어스에 올리기로 했다. 머릿속에서는 혼란의 샤우팅이 계속 이어졌지만, 삼일절 밤부터 촬영해서 상세페이지를 만들었다. 3월 3일 새벽, 아이디어스에 제품 업로드를 마쳤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주문은 없지만, 그래도 이전과 비교하면 한층 고요하다.


작업하는 내내 『실패를 통과하는 일』을 오디오북으로 틀어두고 들었다. 회사를 매각한 창업자가 돌아보며 하는 이야기를 창업을 준비하며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신기하게도 책에서 또 영화 '컨택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모든 과정과 끝을 알면서도, 그때로 돌아가면 다시 할 것인가? 이 질문을 들으며 반대로 먼 훗날의 무나니스트를 떠올려 본다. 언젠가 끝내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하고 싶니? 응. 하고 싶어.


누군가는 인간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마지막 해가 26년이라고 한다. 지피티는 아니라고 하고, 제미나이는 하나마나한 말만 늘어놓는다.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 전혀 감이 오지 않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지금 삽질을 해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미래의 나는 다행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나야,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어. 그러니 몇 살이라도 언니인 네가 이해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