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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 개복치 Aug 06. 2016

글이 우리에게 힘을 줄 때

그럴 때가 있습니다

illust 김병철


“에세이 같은 걸 써보면 어떨까.” 예전 선배의 제안에 별 고민 없이 에세이 코너를 시작했다. 그 후 이러쿵저러쿵 글을 써오고 있다.


에세이는 글쓴이가 사유와 취향을 자유롭게 풀어내는 글이다. 통찰력도 필요하고, 기교도 좋아야 한다. 세련된 취향을 가졌다면 더욱 유리하다. 언론사 입사 준비가 글쓰기의 전부였던 나로선 힘든 일이었다. 별 고민없이 시작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유명인도 아니고 누가 이렇게 긴 글을 읽겠어’라는 일종의 체념 덕이었다.
 
나는 대학내일의 표지 촬영도 맡고 있는데 표지 쪽은 사정이 다르다. 잡지의 얼굴이라서 나름대로 신경 쓴다. 내가 표지와 에세이를 대하는 결정적 차이는 독자를 어느 정도 고려하느냐다. 표지는 독자 90% + 나 10%. 에세이는 독자 10% + 나 90%. 표지는 독자 위주로 찍되 에세이는 독자 생각은 조금 하고 내 생각을 많이 한다.
 
“월급 받으면서 잘도 그런 짓을 하는구먼” 비난이 들려온다. 그러나 변명이 있다. 사람의 마음에는 보편적인 구석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가령 내 별자리는 물고기자리인데, 예민하고 감정의 폭이 크다고 알려져 있다. 물고기자리를 소재로 예민한 성향을 가진 내가 세상사는 법을 쓴다 치자. 세상에 자신을 둔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꼭 물고기자리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무엇보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 에세이 따위를 읽을 리가 없다. 나는 기인이 아니다. 기인과 범인으로 나눈다면 오히려 범인 쪽에 가깝다. 고로 내 고민은 독자의 고민과, 내 바람은 독자의 바람과 얼추 교집합이 있다. 그러니 내 고민과 내 바람을 에세이에 담아도 되지 않을까. 내 멋대로 에세이 쓸 때의 태도다.   
실제로 그랬다. 30대 중반의 나와 20대 초중반 독자는 공유하는 게 많았다. 글이 촉발한 사유의 씨앗은 독자에게도 유효했다. 평소 고민하던 문제라서 공감한다는 독자 메일이 날아왔다. 난 겸손한 사람이 아니며 이건 내 자랑이다.
 
이번 에세이는 그렇게 메일을 보낸 어느 딱 한 분의 독자를 향한 글이다. 글을 보고 힘을 냈다는 그녀에게 난 가벼운 마음으로 어떤 글이 힘을 줬는지 물었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A4 3장짜리 답변이 돌아왔다. 이 답변은 나에게 적잖은 당혹감을 주었는데, 그녀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개인적 번민을 털어놓으며, 당시 그녀의 마음에 조응했던 글이 무언지 알려줬다. 정작 어떤 글이 힘을 주는지에 대한 설명은 불분명했다. 대신 “기자님은 똑똑하시니까 알아서 생각해내시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라며 끝맺음했다.


그래서 말이다. 이번 글의 주제는 ‘글’이다. 만약 글이 우리에게 힘을 준다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느냐의 이야기다.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 철학자 사르트르가 1964년 4월 18일 자 르 몽드에 실린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소설 『구토』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사르트르는 문학의 쓸모없음을 꼬집으며 상을 거부했다. 아무리 대단한 문학이라도 굶주린 아이의 배를 채워줄 수 없단 이유에서였다.
 
모두 이미 아는 비밀(?)을 알려주자면, 글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대학생을 예비 백수로 만드는 사회 시스템을 글은 바꿀 수 없다. 나는 ‘청년이여 좌절하지 마라 너희에겐 창창한 앞날이 펼쳐져 있으니’ 류의 글을 무척 싫어하는데 그런 글이 보통 창창한 앞날을 이미 누리고 있는 이들 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청년이여 짱돌을 들고 나서라’ 류의 글도 별로 흥이 없다. 글 쓸 시간에 본인이라도 대신 짱돌을 던져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한다.


청년 실업 문제를 지적하는 글들만 모아도 잠실 운동장을 꽉 채울 만큼이겠으나 청년 세대의 백수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글쓰기보단 정치나 경영을 하는 쪽이 낫다.
 
글은 타인의 마음을 바꾸지도 못한다. 세상 무엇보다 상대를 사랑하지만 상대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어떤 글도 상대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지 못한다. 대문호 괴테도,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짝사랑 상대를 설득하지 못했다. 심지어 글은 사랑이 끝난 후 찾아오는 아픔을 없애주지도 못한다.


여러분도 겪어봤으니 알겠지만 이별의 아픔을 덮어주는 건 다른 사랑 혹은 시간의 흐름이지 절대 글은 아니다. 글 읽는다고 아픔이 사라질 거면 대형 서점 절반은 사랑 서적으로 찼을 테다.  
 
사회도, 사람도 바꾸지 못하는 글이 대체 우리에게 어떻게 힘을 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글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어떤 관점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독자가 생각해보지 않았거나, 머릿속에 두루뭉술하게 뭉뚱그려져 있던 생각과 감정을 선명히 해주는 게 관점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인생의 소설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꼽는다. 소설 속 주인공은 ‘관념의 노예’로 살아가는 평범한 지식인, ‘이렇게 해야 바르게 사는 거겠지.’ ‘행복한 앞날을 준비하려면 저런 짓은 하지 말아야겠지’ 주인공 앞에 자기 욕망에 솔직한 조르바가 나타난다.


조르바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열심히 찔러본다. 화가 나면 정정당당히 싸우고, 화해하면 툴툴 털어버린다. 주인공은 종교, 관습 어디도 기대지 않는 조르바를 보며, 이리저리 계산하고 따지다가 인생을 허비하는 자신을 깨닫는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독자 역시 관념에 사로잡혀 자기 욕망을 부정하는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건실하게 살아왔지만 마음 한편에 응어리져있던 답답함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글을 통해 우리는 취직 실패가 온전히 자기 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미취업은 괴로운 일이지만 미취업의 고통을 필요 이상으로 부풀리는 자괴감을 줄일 수 있다. 글을 통해 우리는 이별의 순간을 좀 덜 드라마틱하게 바라볼 수도 있다. 사랑이 사소한 몇몇 사항이 얽혀 생긴 비논리적 감정이란 걸 깨닫는다면, 이별의 원인과 결과를 차분히 바라볼 수 있다. ‘사랑은 영원해야 해’라며 억지 부리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디테일한 노력을 하게끔 인도해준다.
 
요약하자면, 글은 자기 자신과 선명히 마주할 수 있게 해준다. 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못난 모습, 잘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게 되며, 타인에게 자신을 공개할 당당함을 얻는다. 소통이란 세 치 혀를 잘 놀리는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것. 자기를 공개할 줄 아는 건강한 마음은 결국 세상과 소통할 지렛대가 된다. 만약 어떤 글이 독자에게 힘을 준다면 이럴 때가 아닐지. 메일을 주셨던 독자 OO씨 이렇게 생각합니다.
 
대학내일 이정섭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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