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즐겁지는 않다.
자취 20년.
누군가는 싱크대에 그릇 쌓이는 꼴을 못 봐 본능적으로 먹자마자 치우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한 끼 두 끼 조금씩 쌓아두고 '아~ 정말 하기 싫지만 더 이상 쓸 그릇이 없네..' 싶을 때쯤 설거지를 했다.
심할 때는 식기들이 흘러넘쳐 장대한 산을 이룬 적도 있다. 막상 시작하면 별거 아닌 일임에도, 식사 후 바로 씻으면 아주 간단하게 끝나는 일임에도 나는 절대 싱크대로 다가가지 않았다.
식사 후의 안락함과 여유를 설거지나 하면서 깨고 싶지는 않았으니 계속 미루고 미뤘던 것 같다. 설거지쯤은 나중에 해도 괜찮지 않나.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 산처럼 쌓이고 나면 무슨 거라사도 치르듯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했다. 이게 이렇게까지 마음먹고 해야 할 일인가?
그러던 어느 날. (비교적 최근)
저녁을 먹고 소파에 누워 멍하니 TV를 보다가 문득 싱크대 위의 수북이 쌓인 식기들을 보았다. 항상 보아오던 그릇의 산이었는데 이상하게 그날은 그 장면이 너무 꼴 보기 싫었다. 당연히 설거지거리들을 보고 유쾌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게까지 꼴 보기 싫었던 적은 처음이 아니었을까.. 벌떡 일어나 바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식사 후 곧바로 설거지를 한다. 밥을 먹자마자 소파에도 가지 않고 그릇을 들고 씻는다는 건 내 인생에 정말 놀라운 일이다. 나도 싱크대에 그릇 쌓이는 꼴은 못 보는 인간으로 변하다니!
무려 20년 가까이 몸에 익은 습관이 특별한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변한 건 어쩌면 어떤 무의식의 외침이 오랜 시간 축적되어 폭발한 게 아니었을까?
뭐 처음부터 그냥 식기세척기가 있었다면 해결될 일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