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리움을 하면서 잡생각
달그락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이고 규칙적으로 집 안에 울려 퍼지자 아내가 이내 범인을 직감한 듯 남편을 찾아 나선다. 범인은 안방과 연결된 베란다 창틀에 엉덩이를 질펀하게 내려 깔고는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남편, 그러니깐 바로 나다. 베란다는 이미 흙과 모래, 어디서 주워온 주먹만 한 돌 그리고 이끼와 고사리가 플라스틱 통에 담겨 식재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내는 오늘은 또 무슨 짓을 하느냐 성화를 내기 시작한다. 나는 좋은 걸 보여준다며 아내에게 손사래를 치고 눈앞의 유리병에 집중한다.
유리병은 둥근 볼(bowl) 형태로 볼링공과 사이즈가 거의 흡사하다. 며칠 전부터 유튜브와 블로그를 보며 정보를 수집해 왔기 때문에 재료가 준비된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작은 숯 한 줌을 바닥에 깔아본다. 투명한 유리병 위로 시커먼 무언가가 깔리는 것 만으로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하는데, 이 숯이 유리병 속에서 수행할 막중한 임무를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다. 숯은 그런 것이다. 활활 타오르면서부터 그 생을 장렬하게 마감할 때까지 빈틈없이 유익한 삶을 살다 간다. 숯의 영면을 위해 마사토를 덮어 준다.
마사토는 왜 미사토와 비슷한 이름을 한 것일까? 아, 미사토는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카츠라기 미사토다. 미사토는 성숙한(몸도 마음도) 성인 여성 그 자체였다. 가끔 등장하는 므흣한 장면들은 스치기만 하여도 불타오르던 그 시절 나의 아랫도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마사토가 왜 미사토 이야기로 빠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꼭 마사토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미사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미사토, 아니 마사토는 크고 우람한 돌을 품고, 양분이 가득한 축축한 배양토로 뒤덮였다. 배양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이 들어 분갈이용 흙을 조금 섞었다. 배양토와는 달리 흙은 매우 건조하고 중간중간 정체 모를 나무 조각들이 보인다. 정제된 흙보다 이물이 섞인 편이 더 자연스럽다. 배양토가 자신의 속내는 일절 내보이지 않고 자신의 능력만 믿고 젠체하는 명문대 출신의 재수 없는 녀석이라면, 분갈이용 흙 쪽은 수더분하고 묵묵한 편이라서 주변에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결국 알아볼 수밖에 없는 그런 녀석이라 오히려 더 정감이 간다.
마침내 유리병 속 세계에는 언덕이 생겨났으며, 커다란 바위 산도 생겨났다. 이 바위산은 사실 몽돌해수욕장 출신이다. 몽돌 채취는 금지되어 있어 주변을 둘러보다 최대한 몽돌 같지 않은 돌을 가져왔다. 이 바위산은 몽돌해수욕장에서 비주류로 숱한 탄압과 차별을 받아왔는데, 모난 모양으로 인해 파도가 내리칠 때마다, 바닷물이 몸을 휘감아 여기저기로 쓸려 다닐 때마다 다른 몽돌과 달리 더한 고통을 받았을 것이고, 둥글고 부드럽고 앙증맞은 몽돌만을 찾아다니는 관광객의 냉기 어린 시선을 견뎌 냈어야 했다. 이 바위산의 산 역사를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 유리병에서는 당당하게 바위산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고, 이제 그 주변은 촉촉한 비단이끼와 상록넉줄고사리가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