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9월부터해서 술에만 돈을 한 팔십 만원은 쓴 것 같다. 미친 놈이다. 하지만 가을만 되면 여름이 끝났다는 그 해방감에 술을 먹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세상은 미친 놈들 천지인데, 취하지도 못하는 놈이 바보 아닌가? 실로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하늘 한 번 보고 술 먹고 술 먹고 또 하늘 한 번 보고. 문제는 그냥 말이 아니라 강에 사는 말이라 좀 문제다. 그래 나는 하마다. 김춘수가 아니라도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진짜 위험해서 아프리카에서도 수위권이다. 오늘도 준수 사장님이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나 젊었을 땐 72kg였는데…” 하면서 혀를 찼다.
어제도 술을 달렸기 때문에 오늘은 속죄의 진짜 달리기를 했다. 9월달 부터 오늘까지 뛴 거리가 78km쯤 되기 때문에 대충 1km에 만원씩 술을 먹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5km 찍고 집에 돌아오고 싶었는데 꾹 참고 7km 찍었다. 저녁 먹고 뛰었더니 막 속도가 나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완주는 했다. 어제는 술 달리고 오늘은 성북천 달렸다. 보통은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뛰는데, <붉은 오늘> 자주 듣는 편이다. 얼마 전 인터네셔널 에피소드 다 들어서, 오늘은 <김혜리의 필름클럽> 들었다. <바빌론> 편을 듣는데, 내가 마냥 좋아하는 영화라서 김혜리의 지적들을 매우 즐겁게 들었다. 과잉의 영화이며 위대한 예술에 수반되는 희생을 다루고 있다지만, <바빌론>이 호소하는 영화 예술의 위대함은 충분히 설명되었는가? 또한 야만과 광기의 할리우드를 재현하는 장식이 마약, 일탈, 배설 등으로 얼룩진 지나치게 말초적이고 간단한 방식 아니었는가? 저스틴 허위츠 음악 틀어놓고 데킬라나 찾고 있던 나는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이다.
주말에는 또 영화 달릴 예정인데, 내일은 <해야 할 일>이랑 <우나기> 보고 일요일은 <찬란한 내일로> 볼 것이다. 한글날에는 <룩백> 본다. 내가 영화 얘기 하기 가장 좋아하는 사람 하나는 동현인데, 얼마 전에 동현이 내가 벽을 하나 넘은 것 같다며 칭찬했다. 동현은 정말 숨쉬듯 영화를 엄청나게 보는데, 별로 그것에 대한 기록 욕구나 이런 게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동현에게 많은 영화들은 휘발되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 본인이 관심 있는 담론에 부합하는 영화가 있으면 그걸 가져와서 영화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는데, 별로 못한다. 하지만 대체로 영화를 보는 시선이 대체로 비슷하고, 다른 지점에서도 조율해나가는 대화가 즐거운 편이다.
술 달리고 강 달리고 영화 달린다. 술은 이제 돈 없어서 못 먹는다지만, 사주면 나갈 것이다. 그래도 뒤에 두 개는 10월에도 마저 달려야지. 뜀박질 하는 인생 즐겁다. 씻고 나서 차가운 보리차 마시면 강해진 기분이 든다. 당분간 수염은 안 자를 것이다. 23퍼센트의 사람들이 날 지지해줬다. 연구실 후배가 그 놈들 다 간신이라고 다 쳐내라고 했는데, 어차피 나는 폭군이고 진짜 충신들은 이미 목이 날아갔다. 지난 날의 사화를 생각해도 별 감흥이 없으니, 실로 즐거운 계절이다. 뜀박질하기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