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번아웃 디깅하기
재능의 영역 VS 숙련의 영역
모든 일은 성실하고 오래 할수록 숙련도가 늘어난다. 익숙해지는 것. 한국 사회에선 연차가 쌓일수록 이 익숙함이 곧 ‘연차’라는 이름으로 ‘능력’을 대변하기도 한다.
다른 업은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케팅이라는 업은 숙련보다는 재능의 영역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늘 해온 방식으로 해도 시기에 따라, 사람에 따라 매번 다른 결과를 마주하기도 하고, 그래서 익숙한 방식으로 편안하게 일하는 순간 ‘먹히지 않는다.’
4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첫 직장에서 팀 이름은 마케팅팀, 브랜딩팀, 경험설계팀 등 다양하게 바뀌었지만 그 안에 구성원은 마케팅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당연하지만) 팀장님은 10년 이상을 마케팅만 해오신 분이었고 좋은 분이셨지만 매번 ‘그거 내가 해봤는데 잘 안돼’를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점이 참 힘들었다. 그럼에도 약간의 기출변형을 통해 ‘그래도 해보자’ 말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연차와 경험이 쌓인 사람이 안된다는데 1-3년 차 주니어가 경험도 없는 것을 밀어붙일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연차 = 능력이구나’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4년 차, 5년 차가 되는 시점에도 비슷했다. 오히려 5년 이상이 되어 이제 막 들어온 신입 후배들과 함께 일하며 ‘아 이런 게 연차가 쌓여 가능한 통찰이구나, 효능감이구나’ 하고 느낄 때도 많았다. 시간이 갈 수록 익숙해지고 더 많은 경험이 쌓인 연차 = 능력이 어느 정도 맞긴 하지만, 간과한 것은 ‘마케팅’이라는 업에 대한 변수였다. 1+1 = 2처럼 늘 정해진 답이 나오는 영역이 아니었다. 기획의 참신함도 중요하지만 비슷한 포맷의 기획이어도 실행 방법이 늘 달라졌다. 결과 또한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을 마주할 때도 있어서 연차로 쌓인 자신감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기도 했다.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며 연차가 쌓일수록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른 시니어는 기발한 기획과 촘촘한 실행으로 더 멀리멀리 나아가는 것 같은데, 그건 연차가 쌓여서 되는 게 아니라 재능이 만들어 낸 결과이지 않을까 하며 자조하기도 했다.
재능;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훈련에 의하여 획득된 능력을 아울러 이른다.
그럼 나에게 있는 재능은 무엇일까? 연차가 쌓이는 것 말고, 연차를 제외하고 나에게 남은 역량은 무엇일까?
그동안 일하면서 만난 동료, 선-후배들에게 받은 피드백을 바탕으로 회고해 봤다.
- 레퍼런스를 다양하게 수집하고 그걸 기획에 연결시킬 줄 안다.
- 진심 자체는 재능이 아니지만 진심을 보여주는 것은 재능이다.
- 대학 전공(시각디자인)의 영향으로 심미적인 커뮤니케이션까지 고려할 수 있다.
- 대학원 전공(서비스디자인)의 영향으로 고객 시나리오, 심리를 고려할 수 있다.
- 글쓰기를 전공하거나 배운 적은 없지만 꾸준하게 역량 기르기를 지속했고 글을 통해 읽는 이의 이해와 기대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럼, 마케팅적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 계기는?
여유가 있는 조직에서는 카피라이터와 CRM 마케터를 따로 두기도 하지만 내가 경험했던 회사들에서는 브랜드 마케터가 1타 10 피정도는 해야 쓸모를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온/오프라인 캠페인 기획과 온드미디어 운영은 필수고 때론 유튜브 콘텐츠 제작에 투입되어 촬영이나 편집, PD 또는 작가가 되어야 할 때도 있었고, 블로그 콘텐츠 쓰기, 커뮤니티 운영 등 그야말로 지루할(?) 틈 없이 매번 새로운 일을 마주하는 게 브랜드 마케터의 숙명일까?)
그러다 보니 마케팅팀이 따로 있는 조직에서도 캠페인 기획부터 홍보까지 모든 것은 브랜드 마케터의 소관이었고, 그에 따른 CRM 또한 피할 수 없는 업무였다. 그런데 나는 빠른 설득이 필요한 CRM 카피에 취약했다.
애초에 나라는 사람 자체가 빠르게 내 진가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데다, 어그로라도 끌어 클릭률을 높이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처럼 반감이 일었다.
가령 공부 습관 형성을 위해 페이스 메이커와 함께 공부하며 공부하는 커뮤니티처럼 만들고 싶었던 기획에서는 ‘최신형 아이패드’ 등을 강조하여 많은 사람의 참여를 유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경험을 해보게 하는 것이 옳았을지 몰라도 그렇게 상품에 혹해서 들어온 사람들이 오래가지 못할 걸 알기에 개인적으로는 이 기획에서만은 그런 방식이 회의적이었다. 눈에 보이는 경품과 눈에 보이지 않는 습관이라는 가치 중 어떤 것을 강조하느냐의 선택지 앞에서 나는 습관이라는 가치를 선택하고 싶었다. 경품에 혹해 빠르게 선택하곤 후회하는(‘역시 난 의지박약이야’를 생각하게 하는) 경험을 주기보다 잘 선택했다고 진심으로 느끼는(‘나도 하면 할 수 있구나’를 깨닫게 하는) 경험을 설계하고 싶었다.
역량적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나만의 차별점이 될 수도 있다.
“아, 나의 모나고 못난 점들 때문에 나라는 정체성이 좀 생기는 거구나” @빠더너스 오당기 - 천우희 배우편
빠르게 사람들의 행동 유도를 하고 싶다면 ‘불안’을 자극하면 쉽고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마케터로서 불안보다 진심을 자극하고 싶다. 불안은 빠르게 작용하고 진심은 보다 느리게 작용하지만, 요행보다는 정공법이 항상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정답이 없는 고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착하고 좋은 콘텐츠도 브랜드(또는 회사, 또는 마케터)가 원하는 타이밍에 보여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행위의 동기에는 ‘비용’이 있다. 회사에서 비용을 써서 마케터를 고용한 이유는 수익을 창출하기 위함이다. 브랜딩/마케팅을 해서 매출을 내야 한다. 결과물이 보이는 방식이나 속도에서 브랜딩과 마케팅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매출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취지라고 해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삶에 정답이 없듯, 이 또한 정답이 없지만 적어도 이번 사유를 통해 다음 이직을 위해 나의 업에 대한 가치관은 명확해졌다. ‘다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마케팅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