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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니크 Dec 22. 2021

곡은 죄가 없다

에릭 사티 Je te veux (난 당신을 원해요)

클래식 작곡가라면 적어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던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같이 미들 네임도 있고 이름 철자만 봐서는 발음을 어떻게 하는지 헷갈릴 정도가 되어야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남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쇼팽 왈츠  곡을 마무리  즈음 학원 선생님이 추천한 '에릭 사티' 이름을 듣고 아마도 뉴에이지 작곡가일 것이라 추측했다. 곡의 제목도 클래식 곡에서 흔히   있는 'Op.''K.'등의 작품 분류 기호가 전혀 없이 일반적인 불어 문장이고, 선생님이 시범 연주로 들려주시는 음악도 뉴에이지 같은 느낌이어서 추측에 확신을 더해가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에릭 사티는 시몬스 침대 광고 배경음악으로 쓰인 '짐노페디'로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가 맞다. 사티는 '가구 음악'이라는, 늘 그 자리에 있으나 없는 듯한 가구 같은 음악적 스타일로도 유명하니 광고 제작자가 적절한 음악을 고른 셈이다. 집에 가는 길에 레슨곡 제목을 검색해보니 '난 당신을 원해요(Je te veux)'라는 의미다. 원래는 가곡인데 피아노 편곡 버전으로도 자주 연주되는 듯 했다.


소프라노 조수미, Je te veux

사티는 평생 동안 사랑한 사람이 단 한 명 뿐이었다고 한다. 그에게 보내는 연서같은 곡이 바로 'Je te Veux'다. 여기까지 들으면 로맨틱하지만 반전이 있다. 사티가 사랑한 '수잔 빌라동'은 화가였는데 둘은 6개월 동거 끝에 관계를 정리했지만 사티는 이후로도 전 연인에게 매달린 모양이다. 6년도 아니고 고작 6개월 사귀었는데 헤어진 전 연인을 위한 곡도 만들고 평생 다른 여자는 만나지도 않았다니... '난 당신을 원한다'는 말이 더 이상 사랑 고백이 아니라 미친 구남친의 노래로 들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모르는 채 연습만 할 걸 뒤늦은 후회마저 들었다.

수잔 빌라동이 그린 에릭 사티의 초상화

하지만 곡은 죄가 없다.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에서도 <치즈인더트랩>에서도 설레고 두근거리는 분위기를 만들 때 이 곡이 등장한다. 로맨틱하면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멜로디는 노래로 불러도 피아노로 쳐도 아름답게 들린다. 너무 빠르지 않게 흐르는 박자는 쿵짝짝 쿵짝짝 왼손 반주에 맞추어 사뿐사뿐 발을 옮기며 왈츠 춤을 춰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적당하다.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드라마 <치즈인더트랩>


피아노 편곡 버전의 악보는 크게 어렵지 않다. 일단 곡이 시작할 때는 조표(플랫) 없다가 조성이 바뀌어도  1, 플랫 2 정도로 그쳐서 다른 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검은 건반을  일이 많지 않다. 아직 악보를  읽지 못하는 피아노 초보에게는 조표가 많이 붙어있을수록 악보 읽기부터 난관인데  점에서  곡은 나처럼 피아노를 오랫만에 다시 배우는 경력 신입(?)같은 취미생에게 적절한 곡이다.



  다만  곡은 오른속으로 1옥타브를 짚어야 하는 부분이 많다. 도레미파솔라시도가 반복되는 피아노 건반에서 8 거리에 있는 음을 옥타브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엄지 손가락으로 도를 짚고 새끼 손가락으로는  다음에 있는 도를 짚어야 한다는 뜻이다. , 손가락을 있는 힘껏 찢어야 하기에 손이 작은 사람들은 힘들어하기도 한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11도까지 손가락이 닿는데, 어렸을 때부터 손가락이   벌어질  있도록 끊임없이 훈련했다고 한다.


나는 여자치고 손이 작은 편은 아니라 당연히 8도 정도는 쉽게 짚는다. 하지만 8도를 연달아 계속 쳐야하는 건 다른 문제다. 십년이 넘게 피아노를 치지 않아 굳은 손가락에는 당연히 유연성도 남아있지 않은데 계속해서 손가락을 찢어야 하니 조금만 연습해도 오른손목이 아파왔다. 여기에 왼손은 도약을 해야하는 부분이 많아서 왼손 도약 챙기려 오른손 돌보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열심히 연습하며 악보의 3페이지를 넘기니 이번에는 또다른 난관이 찾아왔다. 이 곡 전에 배운 쇼팽 왈츠 두 곡은 오른손 멜로디, 왼손 반주의 구조가 명확했다. 하지만 이 곡에서는 왼손과 오른손이 번갈아가면서 멜로디를 연주해야 하는데(상단 이미지 파란색 표시) 그러면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헷갈리기 시작한다. 당연히 반주보다는 멜로디가 크게 들려야 한다. 전에는 왼손보다 오른손을 조금 더 크게 치면 되었지만 지금은 왼손 오른손 할 것 없이 주 선율에 해당하는 음들을 정확하게 솎아내서 강조해주어야 음악처럼 들릴 수 있다.


총 6페이지 분량의 악보에 도돌이표까지 있어서 원래 속도로 연주하면 5분이 조금 넘는 곡이지만 계속 반복되는 마디들이 많아서 새로 익혀야 하는 부분이 악보 원래 분량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피아노를 다시 배운 초반에는 따로 녹음을 하지 않고 적당히 악보를 익힌 후 다른 곡으로 넘어갔기에 연습기간이 길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이 곡은 영상으로 남겨둘 걸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이 곡을 배우며 참고 연주를 찾아보기 위해 검색하다가 결혼식 축가로 많이 쓰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결혼식에 어울릴법한 다른 곡인 슈만의 <헌정> 같은 경우 아내인 클라라를 위해 만든 곡이지만, 사티는 헤어진 전 여자친구를 위해 이 곡을 만들었는데 이런 배경을 안다면 이 곡이 과연 축가로 쓰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의미를 알면 끈적하고 관능적인 가사와 로맨틱한 멜로디만으로도 축가의 자격은 충분해서일지 아니면 꼭 결혼을 하고 백년해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 아니었던 건 아니니까 상관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이 곡은 결혼식장에서 심심찮게 울려퍼질 것이다. 아마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들리겠지. 우연히 이 곡을 듣고 꽂혔는데 괜히 쓸데없는 사실을 알게 되어 사랑의 노래가 미친 구남친의 노래로 들리기 시작한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곡은 죄가 없다.



* 연습기간: 2020년 4월 8일 ~ 4월 30일

* 참고: 잡지 <모노그래프 monograph No.3 손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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