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삭막한 공간을 우리 동네로 만드는가

by 문지훈 Jihun Mun

낯선 동네의 새 아파트로 이사를 마친 첫날밤을 떠올려 봅니다. 흠집 하나 없는 바닥과 최신식 설비, 창밖으로 보이는 잘 정돈된 도로와 화려한 상가 불빛은 이곳이 살기 좋은 환경임을 증명합니다. 물리적인 거주 조건은 완벽에 가깝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서늘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 마주치는 풍경은 매끄럽지만 건조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행인일 뿐입니다. 아직 이곳은 나에게 집이라기보다는 잠시 머무는 거주지에 가깝고, 창밖의 도시는 동네라기보다는 좌표상의 한 지점인 공간으로 느껴집니다.


도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구분은 바로 이 공간과 장소의 차이에서 시작됩니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이 정의했듯 공간이 물리적이고 기하학적인 영역을 의미한다면, 장소는 그 공간에 인간의 경험과 의미, 그리고 관계가 깃들어 비로소 특별한 가치를 지니게 된 곳을 뜻합니다. 지도 위에 표시된 수많은 건물 중 유독 나의 집이 각별한 이유, 수백 개의 도시 중 내가 자란 고향이 애틋한 이유는 그곳이 단순한 물리적 부피를 넘어 나의 시간과 관계가 축적된 고유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차갑고 중립적인 물리적 공간은 어떤 과정을 거쳐 따뜻하고 의미 있는 장소로 변화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건물이나 도로의 형태가 아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건축물과 편리한 기반 시설을 갖추었다 해도, 그 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지 않고 파편화되어 있다면 그곳은 기능적인 공간에 머무를 뿐입니다. 반면 낡고 비좁은 골목이라 할지라도 이웃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묻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면, 그곳은 비로소 살아있는 장소, 즉 ‘우리 동네’가 됩니다.


현대 도시 계획이 자주 놓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도시나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물리적 밀도와 기능적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설계됩니다. 도로의 폭, 녹지의 비율, 상가와의 거리는 수치적으로 완벽하게 계산되지만, 정작 그 공간을 채울 입주민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형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려는 부차적인 것으로 미루어지곤 합니다. 입주 초기 신도시 주민들이 겪는 삭막함과 우울감은 하드웨어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이웃과 연결될 수 있는 사회적 소프트웨어의 부재에서 기인합니다.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이주해 온 낯선 타인들이기에 서로를 경계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기 쉽고, 이는 도시를 거대한 익명성의 바다로 만듭니다.


반면 오랜 시간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구도심의 풍경은 다른 차원의 밀도를 보여줍니다. 물리적 환경은 다소 불편할지라도, 그곳에는 시간의 두께만큼이나 촘촘하게 쌓인 관계의 층위가 존재합니다. 동네 어귀의 평상은 노인들의 사랑방이 되고, 낡은 세탁소 주인은 동네의 대소사를 꿰고 있는 정보의 허브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관계망은 주민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줄 뿐만 아니라, 아이를 안심하고 키울 수 있는 환경이나 위급 상황 시 서로를 돕는 실질적인 안전망으로 작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부터 주목하고자 하는 ‘관계의 밀도’입니다.


관계의 밀도란 특정 지역 안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연결망의 양과 질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아는 사람이 많다는 정량적인 수치를 넘어, 이웃 간에 형성된 신뢰의 깊이, 호혜성의 수준, 그리고 공동의 문제에 함께 대응하려는 의지를 포괄합니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자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도로와 철도가 도시를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기반 시설이라면, 관계의 밀도는 사람과 사람을 정서적으로 연결하여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로 작동하게 만드는 사회적 기반 시설인 셈입니다.


이 관계의 밀도는 다른 차원의 밀도들과 상호작용하며 도시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머무는 밀도(주거 형태)나 흐르는 밀도(이동성)는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거나 제약합니다. 예를 들어 걷기 좋은 거리와 개방적인 상점이 많은 동네는 우연한 마주침을 늘려 관계의 밀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지만, 자동차 중심의 도로망과 폐쇄적인 단지 구조는 관계의 단절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즉 관계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 공간이 제공하는 기회와 환경 위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물론 관계의 밀도가 높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도시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 전통적인 공동체에서 나타났던 과도한 간섭이나 배타성은 현대 도시인들이 기피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현대 도시가 추구해야 할 관계의 밀도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할 때 언제든 손을 내밀 수 있는 느슨하고 적절한 거리감이 유지되는 상태일 것입니다. 끈끈한 혈연이나 지연이 아니더라도,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 형성되는 담백한 연대감이 현대 도시를 지탱하는 새로운 관계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도시를 진정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화려한 스카이라인이나 첨단 기술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온기입니다. 삭막한 콘크리트 공간을 살 만한 곳으로, 나아가 떠나기 싫은 우리 동네로 만드는 힘은,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이웃과 나누는 눈빛과 대화 속에 숨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힘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행위들이 어떻게 도시 전체의 안전과 활력을 좌우하는지 그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들여다볼 것입니다. 공간이 장소가 되는 마법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아주 작은 관계의 시작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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