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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성 Jan 12. 2021

탈북자는 왜 부끄러운가

일그러진 우리들의 초상

   

"엄마가 부끄러워요!"

“엄마가 부끄러워요!” 담임 선생님을 만나겠다는 엄마에게 초등학생 딸아이가 외쳤다. 사투리가 남아있는 엄마가 부끄러운 아이는 자신과 엄마, 두 영혼에 영원한 상처로 남을 말을 뱉어버렸다. 이 얘기를 들으며 나는 뭉크의 그림이 떠올렸다. 엄마가 부끄러워요, 이것은 아이의 작은 가슴에서 응어리로 돌고 돌다가 마침내 터져 나온 절규이다. 탈북대학생 두 명 중 한 명은 자신이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긴다. 일터에서 오히려 중국동포라고 소개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아주머니가 있는가 하면 여자 친구가 탈북민이라는 사실을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알리기 저어하는 친구도 있었다. 탈북민이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지 이제 15년이 지났다. 남한에서 태어난 탈북 2세들이 사춘기에 접어들 시간이 지난 뒤에, 탈북자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다.     

 탈북자는 왜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예컨대, 독재와 기아, 핵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암울한 이미지라든가, 탈북과정에서 겪게 되는 불행, 혹은 남한에서의 정착과정에서 이런저런 실수들로 인해 각인된 탈북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탈북자는 덜떨어진 사람들이다, 이것이 이 사회의 상식이다. 사람들은 이 상식에 부합되지 않는 탈북자를 보면 당황한다. “전혀 탈북자 같지 않으시네요!” 나는 아직도 이것이 칭찬인지, 야유인지를 분간하기 쉽지 않다.     

그 ‘상식’이 그려놓은 탈북민의 초상에는 사회의 온갖 기대와 욕망의 물감들이 덕지덕지 칠해져 있다. 초상화 속에는 가난한 동족에 대한 측은지심과 ‘먼저 온 통일’, ‘통일의 징검다리’ 같은 공허한 수식어들, 그리고 간첩과 ‘빨갱이’에 대한 경계심까지 모두 중첩되어 있고 그 왼편 아래에 주홍글씨로 큼직한 사인까지 박혀 있다. 그리고 사회적 인식의 탑 위에 높이 걸린 이 그림은 사회를 향해 ‘탈북민은 이래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뿜어낸다. 하지만 이 ‘상식적’인 그림을 조금만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비상식적인지를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가장 슬픈 것은 탈북민들 스스로가 이 일그러진 이미지를 자신의 자화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로부터 가능한 멀리 벗어나려고 애쓴다. 엄마가 부끄러워요! 이 절규는 어쩌면 그 그림의 주홍글씨를 마주 보고 싶지 않은 어린 영혼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것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탈북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가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상처 받은 영혼까지도 치유해줘야 할 책임 있는 세대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탈북민이 부끄러운 존재로 전락하게 된 보다 근원적인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책임을 다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스토리     


 이 세상에 탈북민의 스토리는 차고 넘친다. 탈북민 관련 뉴스는 거의 실시간으로 생산되고, 탈북민들의 간고한 탈북기는 세계어로 번역되며, TV 예능의 장수 프로그램들이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탈북민의 스토리는 일그러져 있다. 내가 볼 때, 탈북민의 일그러진 스토리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북한 정부에서 말하는 ‘반역자, 혹은 배신자’의 시나리오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과 국제사회에서 널리 수용되고 있는 ‘지옥 탈출기’이다. 두 경우 다 탈북민의 이미지는 수축 혹은 팽창되어 일그러졌다. 마치 뭉크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같이. 그 속에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탈북민의 모습이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 정권은 탈북민들을 부모형제와 고향을 등진 비인간적인 “민족반역자”, “사회주의 배신자”로 묘사한다. 다른 요란한 수사를 제외하고라도 부모형제, 고향과 같은 단어들은 탈북민들에게 죄책감을 전가하기에 충분하다. 북한 정부의 전략은 남한의 일부 계층들에게도 먹히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누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시 만날 기약도 없는 부모형제와 이별하고, 고향을 떠나는 데 목숨을 걸겠는가. 탈북민 모두는 역사의 조난자들이다. 그 조난의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는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탈북민의 스토리는 북한 정권이 퍼뜨리는 “패륜아의 탈출기”가 아니라, 가혹한 운명의 파도에 던져진 조난자들의 승리한 투쟁기, 생존기이다. 이 이야기가 과연 부끄러운 이야기인가. 어쩌면 우린 아직도 북한 정권의 세뇌의 올가미를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좀 더 심각한 다른 하나의 스토리가 있다. 미디어는 탈북민을 어떻게 그려내는가. 신문과 뉴스, TV와 예능, 그리고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는가. 뉴스의 댓글은 또 어떤가. 거기에는 암살자, 살인자, 공작원, 간첩, 인신매매의 희생자, 기초수급자, 불법시위와 전단 투척을 생업으로 삼는 무법자들이 있다. 또 한편에서는 지옥의 문을 열고 나온 탈출기의 불사신들과 자유대한민국에 무한히 감사하는 탈북미녀들도 비친다. 미디어 속의 “탈북자”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한다.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의 기대, 실망, 분노, 더 중요하게 시청률은 출연자들이 거대한 자본주의 미디어 세계의 역동적 드라마의 역할극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훌륭한 제어장치이다.     

 결과는 어떤가. 미디어를 통해 심히 분절된 이미지를 접하는 탈북민들은 미디어가 그리는 이미지를 체화하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잘 나가는 탈북민 관련 예능프로그램들을 탈북민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스토리를 갖지 못한 채, 미디어에서 단순한 호기심이나 농담거리로 소비되며 자신들의 자화상에 먹물을 뿌려대고 있었던 것이다.     


탈북민의, 탈북민에 의한, 탈북민을 위한 스토리     


나는 지금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스토리를 만들고 전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수치심을 자부심으로 바꾸어야 할 때라고 믿는다. 그 스토리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들 각자의 진짜 실체를 보여 줘야 한다. 전체로서 탈북민의 밋밋한 2차원적 초상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개별적 존재로서의 우리 삶의 3차원적 충만함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의 좋은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나쁜 것까지, 우리의 자랑뿐만 아니라 우리의 수치까지, 그리고 우리의 과거와 절망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와 희망까지도 이야기해야 한다. 70년 전, 탈북 1세들이 “굳세어라 금순아”를 불러 자신의 스토리를 전했던 것처럼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자.     

 이제 우리는 스토리텔러가 되어야 한다. 나 자신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그 이야기가 설사 투박하다고 해도 괜찮다. 다만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이야기이면 충분하다. 우선 그 이야기의 첫 청취자는 자기 자신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어야 할 것이다.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글을 쓰고 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이야기하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영화를 만들자.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르겠다면 우선 자신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비록 민둥산이었지만 우리의 추억이 깃든 고향 언덕을 이야기하자. 지도에는 없어도 물소리 정겨웠던 고향의 작은 시냇가 얘기도 하자. 삶의 험로를 꿋꿋이 걸어온 우리의 희로애락을 들려주자.     

 사회가 만들어내는 ‘부끄러운 스토리’가 아니라, 부모가 들려준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 우리 아이들이 언젠가 “엄마가 자랑스러워요!”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게 될 날을 우리가 만들어보자. 그 아이들은 언젠가 자라서 자신의 부모들이 들려주었던 투박하지만 진솔한 부모들의 스토리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이어 쓰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는 부끄러움과 좌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부심과 희망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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