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후 10년, 국경에서 다시 바라보는 북한
다시 국경에 서다
이곳은 압록강 상류의 중국 길림성 장백현. 건너편은 북한의 혜산이다. 10년 전 오늘, 25살의 나는 강 너머로 보이는 산등성이에 서서 불빛 찬란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토끼처럼 충혈된 눈으로 끊임없이 주변을 불안하게 살피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어둠을 타 압록강을 건넜다. 늦가을 백두산 기슭의 강물은 뼈가 시리도록 차다. 하지만, 건너편 강변에 이를 때까지 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추위에 굳어지는 젖은 옷가지를 비틀어 짜며 누군가 귓속말로 물었다.
“추워?”
“아니.”
“떨고 있는데?”
정말로 내가 떨고 있었다면 그것은 추위보다는 등 뒤쪽 초소에서 경비를 서는 국경수비병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북한 쪽 하늘을 향해 어머님께 했던 말을 다시 되뇌었다.
“꼭 살아서 돌아올 날이 올 겁니다.”
그리고 지금, 10년 전 들뜬 희망으로 바라보던 중국 땅에 서서 무거운 마음으로 고국 땅을 바라본다. 살아는 있지만, 아직 돌아갈 수 없는 산하를 바라보며 가만히 옛사람의 시구를 떠올려본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곳 없네
국경의 중력
이번 탐방은 지난해 늦가을 압록강 하류의 도시 단둥에서 시작됐다. 언젠가 가야지 하면서도 10년이나 미뤄왔던 걸음이라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마음은 기대로 부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국의 변방 도시에서 나를 놀라게 한 건 북한을 구경하려 중국의 방방곡곡에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구름 떼처럼 모여든 관광객들도, 북한이 돌관공사로 위화도에 두 달 만에 쌓아 올린 수해복구 아파트도 아니었다(마치 폐허 같아 보이는 15층 아파트를 가리키며 현지인들은 공짜로 줘도 무서워서 못 살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정말 놀란 건 이 모든 것을 보면서도 덤덤한 내 마음이었다. 경제특구 개발이 전면 중단된 황금평도, 불 꺼진 신의주의 쓸쓸한 야경도, 지어 공사장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북한 곡조(평소라면 흥얼거리고 따라 불렀을 것이지만)도 전혀 내 마음에 그 어떤 감정의 물결도 일으키지 못했다. 나는 잠깐 내 마음이 고장 난 것인가 의심해 보았다.
유일하게 내 마음에 감흥을 일으킨 건 압록강이었다. 오리 대가리의 푸른빛을 닮았다는(압록) 이름이 무색하게 강은 누런 흙탕물이었다. 그 누런 흙탕물이 강기슭으로 몰아온 것이 반가움의 인사인지, 노여움 가득한 질책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국경은 이상한 중력으로 시공간을 왜곡시켰고, 내 마음은 거기에 반응해 버렸다. 여행의 첫날에 난생처음 만난 가이드에게 내가 북한 출신임을 터놓았다. 중국은 탈북민을 북송시키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게다가 단둥은 북한 보위부가 제집 마당처럼 드나들며 악행을 일삼는 곳이다. 다행히 조선족 출신 가이드는 말이 정말 잘 통해 우리는 곧 호형호제하며 술을 마시다 고량주에 격앙된 동포애가 폭발해 급기야 멱살을 잡고 몸싸움까지 벌였다. 왜 싸웠는지는 둘 중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덕분에 우린 여행 동안 서로의 멍든 얼굴을 가리키며 낄낄댈 수 있었다.
압록강을 따라 의주와 만포, 자성 등 북한의 도시들을 바라보며 거슬러 올랐다. 지난여름의 폭우 피해가 남아있는 와중에도 가장 빨리 복구되는 것은 유실된 국경 차단 철조망이다. 이제 북한사람들은 철조망과 카메라로 봉쇄된 국경 안쪽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10년 전만 해도 한 해에 천명 이상의 탈북민이 남한으로 입국했지만, 최근 그 수는 백수십 명 규모이다. 그나마 대부분은 오래전에 탈북해 제3 국에 머물던 사람들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북한을 탈출한 사람은 극소수다. 이제 탈북은 거의 불가능 해졌다.
압록강의 물살은 더 빨라졌고, 그에 비례하기라도 하듯 시간도 덩달아 빨리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고무줄처럼 한없이 늘어지던 시간은 갑자기 누군가 한쪽 끝을 놓아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내 맘을 헤집고 살 같이 지나갔다. 나는 시간의 실타래가 풀어놓고 달아난 내 마음의 풍경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압록강은 푸르다
중간진에 이르렀을 때, 나는 혼탁하던 압록강이 어느새 푸른 색깔로 변해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내가 그 강에 화가 나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신의주에서 처음 보았던 그 누런 강물이 지난여름 북한을 휩쓸어간 대홍수를 떠올려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이 강에서 스러져 물가를 떠도는 (나일 수도 있었던) 영혼들이 생각났던 것일까. 나는 압록강 위로 쏟아진 역사의 무자비한 화살이 비켜 간 운 좋은 영혼인 것이다.
오를수록 강은 더 푸르러지고 마침 절정기를 맞아 붉게 타는 단풍이 피같이 진해졌다. 혜산이 가까워지자 내가 얼마나 이곳에 오고 싶어 했는지 알게 되었다. 혜산은 탈북을 준비하며 4년을 살았던 도시다. 그쪽에서 넘어온 장작 타는 냄새와 삶의 소음이 잠자던 추억들을 흔들어 깨웠다. 내가 기억하는 압록강의 물줄기는 그동안의 큰 물에 바뀌어 버렸고, 오래전 친구들과 강가에서 멱을 감고 몸을 말리던 너럭바위도 찾을 길 없다. 사랑했던 사람과 즐겨 찾던 낡은 영화관은 그대로인데 그녀가 살던 집은 그 사이 생겨난 고층 아파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강 너머로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행여 아는 얼굴이라도 발견할까 싶어 초망원카메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북한 내부의 파트너는 이제 국가에 등록하지 않고는 골목장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전하지만 익숙한 거리의 골목장은 10년 전보다 더 붐비는 듯하다.
마침내 내가 강을 건넜던 지점에서 북한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나는 내 마음에 작용하는 엄청나게 큰 하나의 힘을 감지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이 두려움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감추려고 탈북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객기를 부리기도 했지만 결국 그건 부끄러움을 정면으로 마주 보지 못하는 내 마음이 조작해 낸 거였다. 홀로 떠난 자의 죄책감과 동포들을 위해 할 게 많지 않은 무력감에서 탄생한 부끄러움은 나를 둘러싼 ‘풍요’와 내가 누리는 ‘자유’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 내 일상을 짓누르는 감정의 본질이 되었다. 나를 이곳에 쉽게 오지 못하게 했던 것도, 이번 여행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도 바로 가슴에 꽁꽁 감싸져 있던 그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었다. 나는 압록강이 아니라 스스로에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인식이 지난 10년간 서서히 말라버린 내 마음속에 살며시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움튼 파릇한 슬픔은 마음 언저리에 이슬처럼 매달렸다가 강물 위로 뚤렁 떨어졌다. 압록강은 슬픔의 색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