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종이

돼지 타던 소년의 이야기

by 의성


이제 거의 사어가 된 망종이라는 말은 아주 몹쓸 종자라는 뜻으로 ‘말종’의 표준어이다. 어릴 적 동네에 나와 동갑인 망종이 하나가 살았다. 하지만 우리 동네 망종이는 단어의 원래 뜻과는 달리 아주 우량종이었다.


농장의 씨돼지였던 망종이는 웬만한 송아지도 뺨칠 우람한 기골로 농장 탈곡장 대문을 들이받아 쓰러뜨리는 괴력과 주변 100리 안에 수천의 자손을 퍼뜨린 후에도 결코 시들지 않는 왕성한 정력을 과시하는 수퇘지였다.


망종이는 자신의 소임에 아주 뛰어난 역량을 보여줬는데, 망종이와 짝을 지은 수많은 암퇘지들은 넉 달 후면 어김없이 다산의 낭보를 전해왔다. 특히 그즈음에는 망종이를 통해 사돈을 맺은 이웃 농장들에서 스물 두 마리네, 스물네 마리네 하며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기록을 경신하고 있어 망종이의 인기와 위신은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


그 늠름한 자태와 탁월한 수태 능력이 입소문을 타고 퍼지며 주변 농장들에서 망종이를 찾아와 순서를 기다리는 암퇘지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망종은 그 행렬에 시샘이 난 어떤 못난 아저씨가 지어준 별명일지도 모르겠다.


마을의 명물이자 농장의 자랑이었던 망종이는 공동으로 사육하는 돼지우리에 들어가지 않고 동네의 구석구석 땅을 뚜지며 영역표시를 할 수 있었던 농장의 유일한 ‘자유 돼지’였다. 언젠가 위에서 내려온 간부가 망종이의 분에 넘치는 ‘자유’를 못마땅하게 여겨 우리에 가두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우리에 갇혀 있는 동안 망종이는 식음을 전폐하고 아무리 매력적인 암놈이라도 절대 곁을 주지 않았다.


다산의 부푼 꿈을 안고 수십 리를 걸어 망종일 찾아왔다 목적도 이루지 못한 채, 안달 난 자신의 암퇘지에게 애꿎은 분풀이 하며 돌아서는 주인들의 입에서 좋은 얘기가 나왔을 리 만무했다. 바빠 난 농장에서는 결국 그 간부가 돌아가기 바쁘게 망종이를 다시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망종이 마을을 마음껏 배회할 자신의 ‘자유’를 반납했던 적은 결코 한 번도 없었다. 망종이가 가을철 김장 무처럼 늘씬한 허리와 남산만 한 엉덩이를 유유히 흔들며 안개 피어오르는 실개천 너머 초원에서 풀을 뜯는 자태는 그 자체로 황홀한 풍경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신화적 숭엄함까지 자아냈다.


동네 아이들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망종이 등에 한 번 올라타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망종이 성질머리가 워낙에 호락호락하지 않아 누구나 쉽게 이룰 수 있는 소원이 아니었다. 장난 꽤 친다는 동네 형들이 수없이 도전했지만, 등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하고 뒷다리에 채우거나 주둥이에 팽개쳐지기가 일쑤였다. 누구든 망종이 등에 오른다는 것은 또래 중에 으뜸이 된다는 것이기에 승벽심 있는 아이라면 한 번쯤 그 위에 올라앉은 꿈을 꾸었을 터였다. 하지만 엄청난 괴력을 가진 녀석의 등에 오르는 건 아무리 힘센 장정이라도 선뜻 내키지 않는 모험이었다. 특히 그 등에 가까스로 올라탔던 이웃 마을 아무개 형이 굴러 떨어지며 머리를 다쳐 이상해진 이후로는 아무도 도전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망종이가 우리에게로 왔다.


시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는 우리에게로 망종이 몸소 행차한 것이다.


망종이는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슬그머니 궁둥이를 우리 쪽으로 향하고는 그 우아한 몸에서 유일하게 볼품없이 말려 올라간 꼬리를 채찍을 휘두르듯 공중에서 두어 바퀴 휙휙 돌리고는 마치 총을 맞은 듯이 옆으로 털썩 드러누웠다.


애들의 눈빛이 공중에서 부딪쳐 반짝였다. 그 눈빛은 꿈에도 그려오던 기회가 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움직이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네가 한번 해보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갑자기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11살의 공명심이 끓어올랐다. 의식할 사이도 없이, 나는 만류와 부추김이 뒤섞인 아이들의 울부짖음 속에 어느새 망종이의 등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망종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킬 때 지구가 빙그르 돌았다. 손등의 핏줄이 툭툭 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망종이의 목덜미와 등 사이 어디엔가 납작 엎드려 내 팔이 닿는 곳까지 활짝 펼쳐 꽉 움켜잡았다. 수퇘지 특유의 누린내가 들뜬 마음을 한껏 취하게 했다. 망종이 슬슬 속도를 내며 앞으로 달리기 시작할 때 뒤쪽에서 아이들의 아우성이 들렸다. 등골에서 지르르 흐르는 전류를 느꼈다. 마치 이륙을 앞둔 비행기처럼 망종이는 앞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가고 있었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환희와 함께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서는 공포감이 동시에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갑자기 내가 하늘 위로 붕 하고 떠올랐다.


직선으로 달리던 망종이가 갑자기 골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90도로 방향을 틀었고 나는 그대로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짧은 순간, 11년 길지 않은 삶이 영화 화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나는 쿵 하고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소리를 들었다기보다는 느꼈다. 옆구리를 찌르는 예리한 아픔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고막을 자극하는 아이들의 고함에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양배추 그루터기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다. 목구멍에서 쯥쯜한 피 맛이 느껴졌다. 갈비뼈 사이를 파고드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를 영화에서 보았던 주인공 같다고 느끼며 산처럼 일어섰다.


아이들이 놀라움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피가 흐르는 내 코를 가리켰다. 나는 웃었다. 코 밑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가슴에서는 긍지가 흘렀다.


망종이는 어느새 저쯤 멀리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능청스레 풀을 뜯고 있었다. 뒤를 돌아 내가 달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 거리가 2~30m 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그 20m에 내 소년 시절의 전성기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몇 해가 흘러 농장 사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농장 돈사에서 돼지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고 결국 망종이만 남았다. 주변에서 망종이를 찾아오는 암퇘지 수도 점점 줄었다. 특별대우를 받던 망종이의 사료도 거칠어지고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며 빛나던 망종이 털도 함께 거칠어졌다.


나날이 여위어가는 망종이를 바라보는 주린 사람들의 퀭한 눈에서 이따금 살기가 번뜩였다. 급기야 농장 사람들 사이에서 불길한 논쟁이 시작했다. 망종이 더 여위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편과 농장의 전설이자 마을의 보물인 망종이를 절대로 해칠 수 없다는 편이 다투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전자가 후자를 압도했다.


결국, 망종이 최후의 날은 5.1일 노동절로 정해졌다.


그날, 비가 왔다.


곳곳에 빗물이 새는 탈곡장 지붕 아래에 망종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흥분으로 들떠 있는 아저씨들은 슬픔을 참고 있는 것 같았고, 슬픔에 잠긴 표정의 아줌마들은 기쁨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망종의 최후를 더 잘 보려고 비를 맞으며 높다란 덕위에 친구들과 웅크리고 앉았다.


도리깨질을 하는 널따란 마당 복판에서 네 명의 장정이 망종이 목에 밧줄을 걸어 앞쪽에서 당겼다. 망종은 네 발을 땅에 딱 딛고 서서 안 끌려가려고 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그 옆으로 거구의 공무반 용접공 아저씨가 그림자처럼 다가서더니 마치 높이 뛰기 선수처럼 도움닫기를 하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을 날려 망종이 이마를 향해 해머를 휘둘렀다. 해머가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히 망종이 두 눈 사이에 떨어졌다.


사람들 사이로 아! 하는 비명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간 뒤, 1초, 2초, 3초.


야위었지만 여전히 늠름한 체구의 망종이, 마치 몇 년 전 내게로 다가와 등을 내어줄 때처럼 쿵 하고 옆으로 넘어갔다. 동시에 내 맘속에서도 뭔가 쿵 하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의 시대가 작별을 고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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