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ZIO COLONIA
2019년 8월 23일
안치오 콜로냐의 날씨는 맑음.
다행히 파도는 얕음.
계절의 변화가 이렇게 두려운 적이 있었을까?
여름이 가는 것이 무서워서 가슴이 섬짓할 정도라고 하면 누가 믿어줄까?
나의 어린 시절에는 한국에는 사계절이 뚜렷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여름과 겨울만 남은 듯하다.
대개 6월부터 시작되는 무더위,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라면서 잠깐 들뜨는 7월, 뜨거운 햇빛과 불쾌지수를 견뎌내는 8월, 그리고 어느새 더위가 갔다며 안도하지만 여전히 더운 9월까지...
이렇게 긴 여름이 가면, 대비할 새도 없이 더 긴 겨울이 온다.
작년 여름은 유독 바빴다. 7월까지 회사를 다니고, 7월 말에 퇴사를 해서 8월에는 인도에서 낮에는 요가를 하고 밤에는 글을 쓰며 한 달을 보냈다. 그리고 9월에 한국에 돌아와서는 책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니 겨울이 왔더라. 눈앞의 일이 많다보니 미처 겨울을 마중가지 못했다.
그런데 올해에는 꽤나 멀리까지 겨울을 데리러 갈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온몸으로 여름을 느끼면서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매주 바다에 오기 때문이다.
여름 휴가철이 성수기인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일주일에 한번은 꼭 바다에 오고 있다.
처음에는 안치오, 다음에는 네투노, 그리고 세번째로 온 바다가 바로 안치오 콜로냐다.
안치오 콜로냐와의 첫 만남은 바람이 불고 추운 날이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바닷속에는 오래 들어가지도 못했는데도 이상하게 이곳에 마음이 갔다.
파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넓은 해변을 자랑하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이런 점들이 더 좋았다.
그래서 그 뒤로도 계속해서 방문하게 되었다.
여러번 오다 보니 이제는 길이 눈에 선하다.
기차역에서 5분도 안 되는 짧은 거리에 입구가 있고, 입구로 들어서서 절벽을 따라 길을 내려오면 바로 가족이 운영하는 카페 겸 레스토랑이 있다. 이곳에서 빨간 옷을 입고, 햇볕에 그을려서 옷 색깔만큼이나 빨간 코와 볼을 가진 아저씨에게 파라솔과 의자를 빌린다. 그러고 나면, 의자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잠을 잔다. 해가 떠서 물이 따뜻하게 데워졌을 때가 되면 일어나서 바닷속에 들어 간다. 나와서 물로 몸을 헹구고, 또 다시 파라솔 아래로 가서 책을 보다 잠이 든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또 바다에 들어갔다 나오고, 들어갔다 나오고... 그러다 집에 가는 기차가 올 시간이 되면 기차역 근처 카페에 가서 '크레마 디 카페' 음료를 마시며 떠나는 것을 아쉬워 한다.
별거 없는 것 같지만, 최고의 하루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그냥 '최고'라는 것보다 나은 표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곳에서 보낸 여름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오늘 읽은 책에서 적합한 말을 찾았다.
읽은 책은 <나는 매번 시쓰기가 재미있다> 인데, 주목받는 젊은 시인들에게 문답형식으로 인터뷰를 한 내용이다. 인터뷰어가 '시가 오는 순간이 언제이냐'고 질문을 했고, 이에 김현 시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혼자가 되는 순간 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순간이지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에도 불현듯 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장면을 떠올리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빠르게 지나가는데 나 홀로 천천히 움직이는. 멍해지는 순간이라고 하면 더 이해가 빠를까요. 특별한 순간은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간입니다.
이곳은 시가 오는 해변이다.
함께 있어도 혼자가 되는 곳이고,
걷잡을 수 없이 외롭지만 가슴이 아프지는 않은 순간을 보내게 해준다.
곧 여름이 끝날 것이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이곳에서 배웅을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