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은 특별했습니다. 동기들과 늘 가던 학교 앞 한식당이 가기 싫어서, 다른 곳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스파게티, 리조또, 돈가스와 김치볶음밥 등을 파는 양식당인지 한식당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동네에나 하나쯤은 있는 그런 작은 식당이었습니다. 당연한 것처럼 런치 세트가 있었습니다. 런치 세트 A는 리조또/돈가스/김치볶음밥+아메리카노(7,900원)이고, 런치 세트 B는 스파게티+아메리카노(9,900원)입니다. 저는 런치세트 A를 주문하고 메인 메뉴는 버섯크림리조또를 선택했습니다.
특별한 일은 음식을 기다리면서 일어났습니다. 정말 작은 식당이었기 때문에 음식이 나오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제 앞에 있던 태영(지난 화에 이어 두 번째 출연)이가 인테리어용으로 책꽂이에 비치되어 있던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함께 있던 지윤 언니가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대답을 했습니다. 여러 질문들이 있었는데, 생각나는 몇 가지를 말해보겠습니다(제가 직접 읽은 것도 아니고, 기억에 의존하고 있어서 왜곡되었을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잘못한 일은?"
저는 바람을 피웠던 것이 가장 큰 잘못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이 가장 잘못한 것 같습니다. 태영이는 말실수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무슨 말이었는데?"라고 묻고 말았습니다. 네, 그러고 말았습니다. 저는 물어보면서도 '아, 그 말이 뭔지 물어봐서는 안 되는 건데....'라고 생각하며 후회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깊은 기억을 아무렇지 않은 듯 물어보는 것은 제가 정말 싫어하는 대화 방식입니다.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떠보듯 말하는 것이 싫습니다.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당사자뿐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가끔 의도치 않게 이런 비겁함이 툭 튀어나옵니다. 진짜 말실수는 제가 해버렸습니다. 다행히 태영이는 대답해주지 않았습니다. 휴, 비겁함을 상대해주지 않아 줘서 고맙습니다.
지윤 언니는 다른 질문을 읽었습니다.
"살면서 꾼 꿈 중 최악은?"
태영은 꿈을 자주 꾼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꿈인지는 말할 틈이 없었습니다. 사실 틈이야 벌리면 생기는 것인데, 태영이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을 지켜본 것은 아니지만, 제가 본 태영은 좋은 것만 알려주는 친구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징징대거나 어리광을 피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강한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슬픈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심히 관찰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칫하면 못 보고 지나칠 것 같습니다.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차리고 싶습니다. 함께 슬퍼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니까, 저는 태영이를 공부할 겁니다.
"삼각팬티냐, 사각팬티냐, 토론하라."
이 질문에 승희와 태영은 사각팬티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내가 입는 거, 아니면 상대가?"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직도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주어를 명확히 해주세요.
또 기억에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화초가 죽어가고 있다. 화초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라."
이 질문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답 없이 흐지부지 끝났습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와서 대답을 하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다 먹고 일어날 때가 되어서 하지 않았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제가 "에이~ 그게 무슨 질문이야?"라고 했었는지 기억이 불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도 기억에 남습니다.
"1초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때마침 태영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길래, 저는 장난스럽게 "1초 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지~!"라고 대답했습니다. 저의 대답에 웃으며 대화가 끝났습니다. 1초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사실 아주 많습니다. 촛불의 불을 끄는 데에도 1초면 충분하고, 누군가를 보며 설렘을 느끼는 데에도, 혹은 누군가에게 상처 받고 그 사람을 마음속에서 내보내는 데에도 1초는 여유롭습니다. 너무 많아서 대답하기 어려웠습니다.
점심을 먹은 뒤에, 학교를 나섰습니다. 사실 오늘이 특별한 가장 큰 이유는 제가 면접을 봤기 때문입니다. 한 회사의 채용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넣었는데, 어젯밤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긴장해서 어젯밤부터 마음에 바위를 얹은 듯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동기들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는 잊고 있었는데, 혼자가 되어서 면접을 보러 가고 있으니 다시 긴장감에 휩싸였습니다.
긴장을 풀기 위해 화초를 생각하고, 빈티지 의류 플리마켓에 들러 셔츠를 사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긴장은 생각만으로는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진짜로 긴장을 풀어 헤치기 위해 홍대입구역에서 내렸습니다. 거기에서 빈티지 의류 플리마켓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원피스 하나와 블라우스 하나를 33,000원 주고 구매했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일이지만)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화초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했습니다. 화초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이 화초를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을까, 화초는 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을 수 없을까...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설명을 하겠어요. 그래서 먼저 말부터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음, 아무래도 말을 못 걸겠어요. 쪽지를 보내야겠습니다.
To. 죽어가고 있는 화초에게
화초야, 안녕?
나는 너의 선택을 존중한단다.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To. 죽어가고 있는 화초에게
화초야, 안녕?
왜 죽어가니?
이건 또 말실수네요.
To. 죽어가고 있는 화초에게
안녕? 안녕~
이게 저의 최선일까요...?
저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죽어가는 화초를 살리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면접에서 잘 보이고 합격을 하겠어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괴로워하고 있는데 시인 친구에게 DM이 왔습니다. 제가 올린 스토리에 어디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안부 인사처럼 보낸 말에 저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응원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저의 친구 시인은 무슨 일인지도 묻지 않고 바로 응원을 보내줬습니다.
나: 나 응원해줘. 응원응원. 빨리빨리.
시인: 헉 늘 응원하지. 응원응원!
나: 앞으로 7분 뒤에 나는 면접을 봐.
시인: ㅇㅁㅇ!(시인 친구는 정말 이런 귀여운 이모티콘을 씁니다.) 응원응원! 잘할 거야.
나: 응! 응응! 잘할게.
시인: "응응! 응원응원의 줄임말."
그 마지막 문장에 저는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쌓였던 긴장과 피로가 녹아내렸고, 무더위에 지친 마음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기분이 좋아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즐거우면 끝이거든요. 그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응응'을 외치며, 편하게 면접을 봤습니다.
제가 편한 마음으로 본 것이 독이 될지, 득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결정권은 저에게 없습니다. 이젠 끝난 일이 되었으니 면접을 잘 봤는지 못 봤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할 수 있는 만큼을 했고, 제가 필요하다면 뽑아주겠죠. 제가 필요하지 않다고 결정이 난다면 많이 슬프겠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아등바등하며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찾을 테니까요. 그렇게 자위하며 집에 오는 지하철에 탔습니다. 긴장이 풀리니 몸이 무겁고 잠이 쏟아졌습니다. 마침 제 앞에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자리에 앉으니, 저절로 아까 자리에서 일어나던 태영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1초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앉을 수도 있지~'라고 속으로 혼자 말장난을 했습니다. 그러다 화초가 생각났습니다. 조금 미안해졌습니다. 면접이 끝나고 마음이 편해지자마자 잊어버렸잖아요. 1초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일에는 화초에게 마음의 쪽지를 다시 쓰는 것도 가능합니다. 아주 짧은 편지라서 1초면 충분합니다.
To. 죽어가고 있는 화초에게
화초야, 응응!
시인 친구가 저에게 해준 것처럼, 화초도 조금 편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