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일기
저희 책방은 큐레이션 서점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책방 주인이 마음에 드는 책만 들여놨다는 겁니다.
그러면 책방 주인이 책을 많이 읽어야겠죠?
맞습니다.
그런데, 책방 주인은 어디서 책을 많이 읽어보나요?
인터넷 구매하면 10%나 할인을 해주고 적립금까지 챙겨주는 혜자로운 알라딘?
가면 없는 게 없는 교보문고 핫트랙스?
아니면 크레마 전자책 리더기가 있는 김에 리디북스?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책을 많이 읽어봐야 그중에 팔고 싶은 책을 고를 수가 있는데,
책을 읽어보려면 어디서든 일단 사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책 도매업체에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을 주문합니다.
주인이 읽어본 책 중에 좋은 책을 판매하는 큐레이션 서점이 아니라,
주인이 읽고 싶은 책들을 판매하는 큐레이션이 되어버릴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듭니다.
다행히(?) 손님이 많지 않아서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아서 서가에 진열하기 전에 읽어봅니다.
그러다 보면 '아, 이 책은 괜히 주문했다.' 거나
'이건 우리 책방에서 팔고 싶지 않다.'라는 후회가 생길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미리부터 불안 해했던 건데,
신기하게도 그런 책은 아직 없었습니다.
어쩌면 책 읽기는 표지와 소개글을 보며 '읽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시작인 것 같습니다.
큐레이션 서점이라고 꼭 주인이 모든 책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불가능해요).
'왜 이 책을 주문했나' 정도를 생각하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안 읽어본 책을 주문하는 기준입니다.
1.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들으며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 책
-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방송입니다. 매일 아침 청소를 하며 듣는데, 여기서 소개하는 책 중에 '아! 이거 진짜 읽고 싶다!'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 책은 주문합니다. 그림책 <여름의 잠수>와 <노를 든 신부>가 이런 경우입니다.
2. 좋아하는 작가의 책
- 인도계 미국인이자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작가 줌파 라히리의 책들
- <향수>와 <좀머 씨 이야기>로 유명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덜 유명하지만 더 좋아하는 작품 <깊이에의 강요>와 <비둘기>
3. 관심 있는 분야
- 식물에 관심이 많아서, 식물에 관한 책들을 주문합니다.
- 한국 여성 작가의 SF 소설을 좋아해서 이 분야의 책들을 모았습니다. 김초엽, 천선란, 심너울, 황모과 작가 등의 소설들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4. 손님이 주문한 책
- 책방에 없어서 손님이 주문하신 책은 그 손님이 원하는 수량보다 더 많이 입고합니다. 편협한 저의 서가를 풍요롭게 해주는 고마운 손님입니다.
찾는 책이 없는 손님들에게 앞으로 더 많은 책을 들일 거라고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서가에 있는 책이 어떤 책이냐고 물어봤을 때 제 나름의 대답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