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와 나눈 이야기
나는 거의 백 년을 살았다.
그래서 내 삶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이 나라가 지나온 시간이 함께 들어 있다.
막내며느리가 내 인생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다고 했다.
내가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살았으니,
그 삶을 우리나라의 백년사에 맞추어 풀어내면
사람들에게 오래 남을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이 내가 살아온 날들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며느리는 주말마다 찾아와 나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시절 사정리에서 살던 이야기부터
결혼 이야기,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이야기, 아들 넷을 키운 이야기, 며느리들을 맞이하던 날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물었다.
나는 기억이 나는 대로 이야기했다.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마을을 따라다니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국민학교 시절, 산수가 유난히 재미있었던 일도 떠오른다. 결혼하여 첫아이를 낳았을 때 기쁨도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며느리는
'어머니는 기억력이 참 좋으세요.'라며 감탄을 했다.
나는 그저 오래 살았던 기억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며느리는 열 번도 넘게 나를 찾아왔다.
그러다 지난주에는 이야기가 이제 마무리되어 간다고 했다.
완성되면 큰 글씨로 인쇄해
책으로 묶어 가져오겠다고 했다.
살다 보니
내 이야기가 책이 되는 날도 온다. 며느리 넷 중에 글을 쓰는 며느리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참으로 고맙고 기특했다.
며느리는 공책 한 권을 내밀며
생각나는 대로 일기를 써 달라고 했다. 내가 직접 쓴 글이 필요하다고 했다.
연필을 잡아 본 것이 참 오래였다. 손에 힘이 없어 연필이 자꾸 미끄러졌고, 국문이 잘 떠오르지 않아 글자도 자꾸 망설여졌다.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몇 줄 적고 나니 금세 지쳤다. 며느리는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된다고 했다.
'오늘 막내아들이 닭죽을 사가지고 와서 같이 잘 먹고 며느리랑 와서 재미있고 얼마나 좋았는지 말할 수 없다. 밤에 정학이한테 전화가 와서 얼마나 반가왔는지 몰라.'
'오늘은 이리 보은센터에 갔더니 한 사람이 생일이라고 생일축하를 부르고 떡도 줘 먹었다.'
'오늘 일요일이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고 점심밥을 먹고 집에로 왔다. 병목이가 다음 주에 온다고 전화를 해서 받으면 언제라도 반갑다. 창학이 엄마가 고기를 사가지고 와서 맛있게 잘 먹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즘 내 머릿속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아들 이야기뿐이었다.
집에 함께 사는 큰아들이 잘해주는 것들,
아침저녁으로 걸려오는 아들 전화가 반갑고,
주말마다 찾아오는 아들도 기다려지는 마음이다.
나는 자식들 얼굴 떠올리는 기쁨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내 일상은 단순하다.
주간보호센터에 다녀와 집에 오면 잠을 잔다. 아침이 되면 다시 그곳에 간다.
주말에는 막내아들과 저녁을 먹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이렇게 반복되는 삶을
나는 벌써 여러 해째 살고 있다,
모든 것들이 정해진 순서대로
조용히, 무리 없이 흘러간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아침이 아니라
그대로 평안하게 잠들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만하면 나는 내 몫의 삶을 충분히 살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더 애쓰지 않고 흐르는 대로 머물면 된다.
오늘도 나는
잘 살았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하루를 내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