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어미랑 사는 큰아들

서울에서 내려온 효자 아들

by 땡자랑

큰아들이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서수로 내려왔다.

늙은 어미를 모시겠다는 말이 참으로 든든하게 들렸다.

함께 산다는 일이 기쁨과 견딤을 함께 한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었다.


2016년 6월이었다. 큰아들네가 이태전부터 팔리지 않던 집이 갑작스레 팔렸다며 내려왔다. 예전부터 아들은 일흔 살이 되면 서울 살이를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온다고 했다. 늙은 어미를 모시고 함께 살겠다고 약속했다. 큰며느리도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같이 내려왔다. 처음에는 새로 집을 짓자고 했다. 하지만 집이 아직 쓸만하니 고쳐서 살고, 남은 돈으로 건물을 사자는 쪽으로 정해졌다. 부엌과 거실을 리모델링을 했고, 우리는 옛날집에서 같이 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의 하루는 늘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마을 노인정에서 가서 점심을 먹고, 사람들과 놀다가 저녁까지 먹고 돌아왔다. 집은 잠만 자는 곳이었다. 노인정에 가면 갑배네, 명인네, 나 그리고 은자까지 네 명은 고정적으로 왔다. 내가 쌀을 씻어 밥을 해놓으면, 세준이네가 찌개를 끓이고 반찬도 만든다. 그네는 밥상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한 후에 청소도 깔끔이 한다.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보다 여럿이 모여 밥을 먹으니 밥맛도 좋았다.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살게 되었어도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노인정에 가서 저녁까지 먹고 돌아왔다. 며느리 하고도 집에서 마주할 시간이 적으니 부딪칠 일도 없었다.


큰며느리는 명절이면 큰애 노릇을 톡톡히 했다. 반찬을 해오고, 집안을 구석구석 치우며, 혼자 남은 나를 걱정했다. 그렇게 참하고 든든한 며느리였다.


주일이 되면 큰며느리와 교회에 갔다. 큰아들도 같이 교회에 갔다. 나랑 아들과 며느리 하고 셋이서 교회에 가면 권사님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아들이 늙은 어머니 모시겠다고 내려오다니 효자네!'

'며느리도 참 착하네!'

그 말들이 나는 자랑스러웠다.


며느리가 내려와 산지 삼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2020년 코로나가 터졌다. 정부에서는 감염병을 이유로 노인정을 폐쇄했다. 갈 곳을 없어진 나는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했다. 며느리도 마찬가지였다. 좁은 집에서 하루 종일 함께 있으니 사소한 것들로 싸우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소리가 크다거니, 화장실 물을 안 내렸다며 사사건건 부딪쳤다. 밥상을 차리는 것도 싫은 내색이 보였다.


불편한 관계로 보름쯤 지난 어느 날, 저녁 밥상머리에서 며느리가 말했다.

'어머니, 김권사님이 술산에 좋은 노인보호센터가 있다는데 다녀보세요.'

나는 버럭 화가 났다.

'니가 드디어 나를 내쫒는구나. 아직은 사지 멀쩡하여 내 손발로 밥도 지어먹을 수 있는데, 어디 나를 요양원에 집어넣으려고 작당을 하냐?'

옆에 앉아 있는 아들에게 물었다.

'너도 나를 요양원에 보내고 싶냐?'

아들도 며느리와 같은 생각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들은 직답을 회피하고 어물쩍 거렸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아들이 나를 더 서럽게 했다.

'난 안 간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딱 잘라 말했다


내 방에 들어와 누우니 참으로 서러웠다. 아들이 같이 살겠다고 내려왔을 때는 세상 복을 다 가진 줄 알았다. 그런데 삼 년도 안돼 요양원에 갈 노인네 신세가 되다니. 하염없이 눈물이 나서 밤새도록 소리 죽여 울었다.


다음날 몸이 좋지 않다고 밥도 먹지 않았다. 아들도 특별히 권하지도 않았고, 며느리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서로 말도 않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 그리고 사흘이 지났다.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누웠는데 내가 요양원에 가야 이 집이 편해진다면 요양원에 가는 것이 어미로서 해야 할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에 일어나서 아들과 며느리를 불러서 요양원에 가겠다고 했다. 며느리는 좋아하며 위로한답시고 요양원이 아니고 노인 유치원이라 학교에 다닌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익산의 노인주간보호 센터에 다녔다. 며느리 하고 하루 종일 함께 있었던 날을 세워보니 딱 스무날이었다. 좁은 집에서 며느리 하고 같이 사는 것이 실은 나도 불편하였다. 아침에 센터에 가고, 저녁에 돌아와 집에서는 잠만 잤다. 다시 평온한 일상이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며느리가 쓰러졌다. 저녁에 밤새 끙끙 앓더니 온몸에 열이 올랐다. 아침이 되자마자 아들은 가까운 임피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서는 큰 병원으로 보냈다. 원대 병원 응급실에서 온갖 검사를 다하더니 암인 것 같다며 서울로 보냈다. 서울 병원에서 난소암 판정을 받았다. 서둘러 입원하였고 다행히 수술을 했다.


수술은 생각보다 잘 되었다. 며느리는 서울에서 삼 개월 요양을 한 후에 집에 왔다. 수술 이후 며느리는 건강관리를 철저하게 했다. 신경은 점점 날카로워졌고 나를 걸리적거려했다. 나는 아프니까 저러겠지 하면서도 견디기 힘들어졌다.


한 번은 센터 차를 기다리던 아침이었다. 잠든 며느리 위로 파리가 날아다녔다. 조심스레 파리채로 그놈을 잡았다. 또 한 마리가 앵앵거리며 날아왔다. 다시 파리채를 들었을 때 갑자기 며느리가 소리를 질렀다.

'하찮은 미물이라도 생명이 있는 것인데 왜 죽이나고요.'

나는 기가 죽어 아무 소리도 못했다. 며느리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런 것이라고 위로했다. 나보다 젊은 저는 곧 죽게 생겼는데, 늙은 시어매가 죽지 않고 건강하니 꼴도 보기 싫은가 보다 생각하니 맘대로 죽지도 못하는 내가 서럽기 짝이 없었다.


사정리에 가서 여동생에게 며느리 앞에서 파리를 잡다가 혼쭐이 났다고 하소연했다.

'성이 이해해, 조카며느리가 몸이 아프니 신경이 날카로워서 그런 것 같아.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 애에게 마귀가 역사하고 있는 모양이야.'라고 위로했다.


병원을 오가던 며느리는 찬바람이 부는 2월에 나보다 먼저 갔다.

죽기 전에 아들네는 군산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내려올 때부터 며느리는 군산에서 따로 살 작정이었다. 틈만 나면 아파트를 사자고 졸랐다. 결국에는 아픈 몸으로 아파트에서 딱 한 달을 살더니 죽었다.

'어머니는 건강하셔서 백 살까지 사실 거예요.'라고 말하더니 늙은 나보다 지가 먼저 가버렸다.


군산으로 이사 가기 전에 며느리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그동안 몹쓸 짓을 많이 해서 죄송했어요.'

나도 말했다.

'아픈 너를 편하게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며느리는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어머니, 여름에는 서수에서 살고,

추운 겨울에는 아파트에서 같이 살아요.'라고 말하던 며느리가 저 갔다


지금은 큰아들과 단둘이 산다. 아들은 조석으로 내 안부를 살핀다. 아침은 같이 먹자며 정성으로 상을 차린다.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심심하게 반찬을 한다. 청소며 빨래며 집안일을 잘도 한다. 추워도 아파트에 가지 않고 내 집에서 겨울을 지낸다. 며느리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어 몇 해는 더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혼자된 아들이 너무 불쌍해서 지켜보는 내 마음이 많이 아프다. 그런데도 아들은 내 앞에서는 죽은 며느리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는다.


나는 안다

묵묵하게 나를 지키는 아들의 효심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서로 의지해가며 아들이랑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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