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시학』을 읽고
이 책은 창작가의 입장에서 나와 상당 부분 이견을 달리하지만, 음악이라는 예술을 깊게 사유하고 자신의 언어로 치밀하게 전개한 점에 대해 분명한 경의를 표한다.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을 감정의 표현이 아닌 질서의 구현으로 본다. 음악은 무질서한 소리 재료에 형식을 부여하여 통일성을 완성하는 행위이며, 작곡가는 영감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라 엄격한 설계자이자 장인이다. 아름다움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이며, 예술가는 작품의 요구에 복종해야 한다는 그의 입장은 일관되고 단호하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의 예술 담론과 분명한 긴장 관계에 놓인다. 특히 ‘보편적 질서’와 ‘선행하는 가치’에 대한 그의 신념은 상당 부분 플라톤적 색채를 띤다. 그는 인간의 감정과 심리에 따라 가변적으로 체감되는 ‘심리적 시간’ 너머에, 보다 객관적이고 불변하는 ‘존재론적 시간’이 있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음악은 그 상위 질서에 합치할 때 비로소 정당성을 획득한다고 본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질서가 과연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초월한 절대적 기준인가, 아니면 특정 전통 안에서 형성된 미학적 규범인가. 스트라빈스키가 말하는 중심, 통일성, 구조적 응집, 질서에 대한 충실함은 서양 음악의 형식미와 깊이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발견된 보편이라기보다 내면화된 규범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질서를 중심에 두는 순간, “질서를 해체하거나 비틀거나 유예하는 예술은 어디에 위치하게 되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모든 예술이 중심을 향해 수렴해야 한다는 전제는 예술의 다른 가능성—불균형, 파열, 우발성, 비동일성— 등을 주변화할 위험을 내포한다. 질서에 대한 복종이 자유를 낳는다는 그의 역설은 인상적이지만, 동시에 그 질서 자체를 의심하는 태도 또한 창작의 한 방식일 수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하기 어렵다. 인간의 삶이 마냥 선형적이지 않듯, 음악 역시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한다는 의견은 복잡한 실존의 층위를 단일한 형식의 틀 안에 가두려는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른다.
결국 보편이라는 말은 그 매혹적인 설득력만큼이나 창작자가 경계해야 할 위험한 개념이기도 하다. 그것이 합의된 이상처럼 보일수록, 그 배경에 놓인 역사성과 권위는 쉽게 투명해지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보편적 질서’가 실상은 시대를 풍미한 특정 미학의 산물일 수 있으며, 그것을 절대적 기준으로 세우는 순간 그 틀에 담기지 않는 수많은 개별적 목소리와 파격의 가능성들은 ‘무질서’라는 이름으로 거세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가치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가 보여주는 일관성과 태도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는 예술을 소비적 감상의 대상으로 두지 않고, 예술을 둘러싼 모든 이들에 대하여 윤리적 책무와 결부시킨다. 예술가를 노동자에 가깝게 위치시키며, 쾌락이나 감상적 해석보다 작업의 엄밀함과 구조적 정합성을 우선시한다. 이 지점에서 예술을 둘러싼 느슨한 언어와 과잉 해설이 범람하는 현시대에서 “작업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경각의 질문을 던진다.
특히 바그너를 향한 그의 냉철한 비판은 오늘날의 ‘설명 중심 감상’ 문화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작품을 해답이 그려진 지도를 들고 소비하려는 대중과 사회의 태도에 대한 경계는 예술가들이 분명히 마주해야 할 대목이다. 예술이 특정 개념의 번역으로 환원되는 순간, 그 고유한 긴장과 생동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음악은 표식의 목록이 아니라, 구조와 시간 속에서 직접 경험되어야 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개인적 동의 여부를 떠나, 예술가로서의 입장을 단호하게 표명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를 지닌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 앞에 타협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그 질문을 사유의 끝까지 밀어붙이는 집요함은 안일한 창작의 관성을 깨우는 통렬한 자극이 된다. 비록 나는 그가 상정한 질서에 온전히 복종할 수는 없지만, 그 질서를 세우기 위해 던졌던 치열한 문제의식만큼은 나 또한 진지하게 마주하고 싶다. 그것은 예술을 둘러싼 언어가 얼마나 가볍게 소비되고 있는지에 대한 경고이며, 우리가 아름다움이라는 결과적 현상에 매몰되어 정작 작품이 스스로 요구하는 논리와 구조에 대해서는 얼마나 외면해왔는지에 대한 성찰이다.
마지막으로 이 대사는 나에게 또 다른 인상을 남겼다.
"그래도 나는 내 안에 더 많은 음악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내어 주어야만 합니다. 순전히 받기만 하는 삶을 살 순 없잖아요."
이 문장은 그의 질서론을 넘어선다. 여기에는 형식 이전의 충동과, 설계로 환원되지 않는 필연이 있다. 그는 음악을 질서의 구현으로 설명했지만, 동시에 그 질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것은 외부의 규범이 아니라, 자신 안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세계를 끊임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경험과 언어, 타인의 사유, 시간의 흔적. 창작자는 그것들을 단순히 축적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재구성하고 변환하는 존재에 가깝다. 그렇게 형성된 내부의 세계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외부를 향한다. 받기만 하는 삶에 머물 수 없다는 자각은 예술가의 윤리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 세계와 맺는 정직한 방식에 대한 고백으로 다가온다. 이 지점에서 나는 그가 구축한 차가운 이론 너머, 뜨겁게 고뇌하는 한 사람의 창작자를 만난다. 이 문장은 결국 그의 완고한 이론을 역설적이게도 인간적으로 보완하며, 창작자의 이러한 태도만큼은 시대를 넘어 여전히 쭉 유효할 것임을 증명한다.
https://youtu.be/rYcz-g8WpMc?si=AfH8w80B4ZCTc9hm
*커버 이미지 출처: Igor Stravinsky, Harris & Ewing Collection(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Igor_Stravinsky_LCCN2016872669.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