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소녀

가장 가까운 도망

by 화원

샛노랗게 질린 달이

뒤틀린 어둠을 먹으며 쫓아와

나는 있는 힘껏 내달려

빨간 칠부바지와 하늘색 카라티


도서관 옆 골목길에 놓인 자갈돌을 넘어

내 발목만 한 새끼 강아지를 넘어

잔디밭 운동장에 놓인 허들을 넘어

나는 사랑이라 적힌 문을 열고 나아가

낯선 냉기를 흠뻑 피부에 끼얹어


언젠가 분명 저 샛노란 달을

내 두 팔과 두 다리로 꼭 껴안아

그렇게 내 품에 힘껏 쥐어냈을 텐데


푸른 철쭉이 심어진 벽돌 화병 안에

삐걱이는 침대에 늘어진 키다리 인형 아래

오렌지 클로버가 매달린 녹슨 열쇠 더미 속에

말라붙은 포도쥬스가 고인 컵의 가장자리에


이따금 번쩍 플래시가 터지면

개미만 한 달빛의 조각이 나를 뒤집어

(하늘은땅이되고땅은하늘이되고)

(내세상은네세상이되고네세상은내세상이되지)


그때 너를 줍지 말 걸 그때 너를 모른 체할 걸

(어서 깨어나야 하는데)

그때 나를 줍지 말 걸 그때 나를 내버려 둘 걸

(달이 곧 나를 뒤쫓아올 텐데)


어른거리는 형상, 유령의 아지랑이

세모진 구석에 처박힌 나의 외피

아주 작고 여린 솜털이 덮인 너를

투명한 손길로 고이 어루만지면

온몸을 에워싸며 일렁이는 곰팡이들


나의 옆에 나란히, 나와 같은 자세로

내가 보는 세상을 바라봐

너의 옆에 나란히, 너와 같은 자세로

네가 보는 세상을 바라봐


넌 누구야? 왜 내 옆에 서있는 거야? 이곳까지 왜 날 쫓아왔어? 내가 멈추면 느리게, 내가 달리면 빠르게. 항상 넌 날 쫓아왔잖아. 왜 이제와 멈춰 선 거야? 날 잡아먹지 않는 거야? 나 너의 몸을 알아. 넌 날 알아? 난 지구를 넘어갈 거야. 널 이곳에 버리고 저 우주를 넘어갈 거야. 나아가야 해. 너로부터 달아나야해. 그러니 대답해. 똑바로 대답해.


머리칼 끝자락에 선 갈대밭의 동산

그곳을 지키는 장난감 병정에게 말을 건네


위아래로 끔뻑거리는 고장 난 입술

저 달에서 쏟아지는 샛노란 빗방울에 엉겨

바스스 바스스. 고막에 고이는 끈적한 침묵


존재해, 나는 모든 곳에

(존재해, 너의 모든 곳에)


하늘색 칠부바지와 빨간 카라티를 입은 나.



시도해 보고 싶었다. 가장 친밀한 접촉이자 가장 불편한 접촉을. 구원의 시도를. 내가 항상 쫓기던 내게. 나를 놓지 못하고 꼭 잡고 있는 내게. 품어보려 노력해도 영원히 품어지지 않는 내게. 감히 행복을 내어주지 않는 내게. 불쑥 이유 없는 추락을 선물하는 내게. 용기를 내 말을 건네고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나는 여전히 나를 쫓는다. 말을 듣지 못하는 나는 여전히 나에게로부터 도망친다. 나는 나를 붙잡지 못한다. 나는 지구를 넘지 못한다. 뒤집힌 우주에서 부패된 몸을 이끌고 달린다. 영원히 함께. 나와 함께.


*이미지 출처: [Pexels]

© Вениамин Курочкин

https://www.pexels.com/ko-kr/@vunyakuroch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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