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성호 Jan 18. 2017

결혼식 축사


얼마 전, 한 때 딴지일보에 기자로 근무했던 친구가 결혼을 했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제도가 우리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예전처럼 엄청난 그 무엇은 아니게 되었고, 자고 일어나면 이혼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세태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결혼은 만만한 일은 아닌데 도대체 왜 자꾸 결혼들을 시도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난데없이 그 결혼식에 나도 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왜? 


요즘의 결혼식에는 신랑, 신부와 양측 가족들, 그리고 신랑, 신부의 친구들 뿐 아니라, 사회자와 주례가 필요하다. 최근 들어서는 그런 상투적인 구성 대신, 약간의 변화가 가미된 결혼식이 많이 치러지는데 이 결혼 역시 마찬가지였나 보다. 주례가 없는 대신 축사를 할 사람이 두세 명 필요하니 그중 하나를 나보고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왜? 


보통 주례는 나이 지긋하고 더 이상 이 사회에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괜히 사람들 앞에서 얘기가 좀 해 보고 싶어서 나서는 것 아닌가 하는 정도로 생각을 하던 나에게 주례가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을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자 일 그람 당황이 된 것도 사실이다. 


젊은 한 쌍이 새롭게 출발하는 자리에 인생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선배가 축복을 블라블라 하는 소리는 다 헛소리다. 결혼식 해 본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결혼식 당일 날 주례라고 불리는 양복 입은 아저씨가 자신들에게 무슨 의미 있는 말을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 무한히 늘어지는 지겨운 문장 중에 단 하나라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 있다면 그 주의력과 집중력에 엄청난 감탄을 해 드리겠다. 보통은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 기본이다.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화장하고 옷 차려 입고 얼굴도 잘 모르는 하객들에게 가면 같은 미소를 띠며 악수를 하다 보면 유체는 저 멀리 블라디보스토크 밖으로 이탈해 버리고 어서 빨리 이 카오스의 현장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게 된다. 사실 아닌가? 최소한 나는 그랬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축사는 최대한 짧게,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는 수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예식 당일 날 행사장으로 가던 도중, 그래도 뭔가 말을 해 달라는데 잘 먹고 잘 살라고만 하면 그건 또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차 안에서 축사 원고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이렇게 해서 그 아무도 안 듣는 긴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뜻밖의 소득이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도대체 왜 내게 축사를 부탁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뭔가 어떤 얘기를 해 줄 것이라고 기대를 하는 것이 있었으니 내게 부탁을 했을 것이다. 그게 뭔지 고민이 되었다. 내가 결혼한 지 이미 이십 년이 다 되어가도록 요즘 보기 드물게 기적적으로 이혼을 안 하고 살아남았으니 무슨 신비로운 비법이라도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런 환상을 먼저 깨트려 주는 것이 도리 이리라. 


늘 하듯이 먼저 구글 검색을 시도했다. 키워드는 결혼, 명언. 격언이나 명언은 원래 이럴 때 창의적인 문장을 생각해내기가 죽기보다 싫거나 아예 처음부터 그럴 능력이 없는 나 같은 작자들에게 훔쳐 쓰라고 만들어둔 문장 은행 같은 것이니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는다. 놀라운 인류의 지혜여~ 


검색 결과를 훑어보고 있자니 결혼이라는 것은 내 예상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황당한 미친 짓인 것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이 강해진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일하러 나갈 때에는 한 번 기도를 한다. 전쟁에 나갈 때에는 두 번 기도를 한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세 번 기도를 해야 한다.” (러시아 속담)


보시라. 결혼은 사람으로 태어나 절대 하면 안 되는 아주 나쁜 짓이거나 생명이 걸려 있는 위험한 행동이라는 얘기이다. 이런 걸 도대체 왜 해? 


"결혼이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여자를 만나면 행복해지고, 설사 나쁜 여자를 만나도 최소한 철학자가 된다." (소크라테스)


그래서 당신은 감방에 갇혀 독을 한 사발이나 먹고 죽었나? 당신의 부인 크산티페가 당신의 죽음에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상당히 믿을 만한 근거를 가진 추론이 있다고. 


이런 격언들을 훑어보고 있자니, 내가 지금 축사 원고를 쓸 때가 아니라 이 결혼이라는 미친 짓을 말리고 그 젊고 착한 친구를 구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사명감까지 살짝 들고 말았다. 이걸 어째야 하나?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정말 하찮고 아무 의미 없는 격언이 하나 있었다. 누가 한 말인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 


“행복한 결혼을 했다면 다른 모든 것에 실패하더라도 성공한 인생이다. “


그럴 리가 있나. 


다른 모든 것에 실패했으면 실패한 인생이지 그게 어떻게 성공한 인생이 되는 걸까? 이런 거짓말이 격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감히 구글 검색에 걸려도 되는 건가? 사회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 건가. 말세로다, 말세..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전기화학적 작용이 발생했는지, 내가 살아온 과정이 내 머릿속을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세상모르고 날뛰던 철없던 시절, 내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인간인 줄로만 알고 스스로의 천재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시절, 40대가 되기 전에 엄청난 돈을 벌어 행복하게 은퇴하고 인생을 즐기겠다는 식으로 터무니없는 인생 계획서를 쓰던 시절, 이 따위 썩어빠진 사회에서 내 인생을 보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이 불쌍하니 내가 자비심을 발휘해서 이 사회를 뜯어고쳐 주겠다고 무한 건방을 떨던 시절..


그러다가 몇 번의 작은 성공에 취해 모든 가용 자원을 다 털어 부어 사업의 판을 키우다가 한 방에 홀라당 날려 먹고 망연자실했던 기억까지 나고 말았다. 이쯤 되면 남의 결혼식 축사가 문제가 아니다. 어디 가서 탕수육에 빼갈이라도 한 잔 들이켜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모든 것에 좌절을 하고 세상의 모든 술을 다 마셔 버릴 것처럼 이어지는 통음의 결과로 더 이상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기력도 없어서 이제 그만 이 지겨운 생을 끝내 버릴까 하던 상황까지 기억이 날 테니 말이다. 그런 창피한 추억을 되살리고 나면 또 며칠간 낯이 뜨거워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 하고 말이다. 


결국 그 시절 내 옆에 말없이 서서 나를 지켜보던 마눌님의 얼굴까지 떠오르고 말았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는 나의 말에 담담하게 그러면 우리 어디로 이사 가야 되는 건가? 하면서 웃던 그 얼굴 말이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함께 한 사람이다. 학창 시절 처음 만나고 십 년에 가까운 연애 끝에 겨우 결혼을 한 정도이니 어찌 보면 내가 태어난 이후 가장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낸 타인이기도 하다. 아니 가족 중에서도 그만큼의 시간을 나와 함께 있어준 사람은 없다. 마치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항상 내 옆에 서 있어준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었다면 내가 정상인으로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내 결혼생활이 이미 이십 년이 다 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큰 고통 없이 함께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고 심지어 그 사람이 좋은 친구라는 점에서 나야말로 다른 모든 것을 실패했지만 결혼만큼은 성공을 한 경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살아가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 집이고 아내의 곁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 공간에서 나는 큰 무리 없이 행복했고, 집 밖에서 겪었던 그 무참한 실패의 기억들을 모두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할 만큼 긴 시간이었다는 것. 


사실 지극히 이과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봐도, 결혼생활을 하는 시간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당연히 제일 크다. 그 시간 동안 행복했다면 전체 인생이 행복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에 전혀 무리가 없다. 결혼에 성공했다면, 성공의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이 될 수 있겠지만, 별다른 고통 없이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성공의 의미라면 나는 결혼에 성공을 했고, 그 덕분에 그렇게 무수한 실패를 겪고도 인생에 성공했다고 우길 수 있다는 점이다. 


내 말이 틀려? 


사실 인생 별 거 없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때가 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가급적 행복하게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소소하면서도 행복하게 흘러가는 작은 시간들이 모여 인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공? 명예? 권력? 돈? 뭘 그런 걸 그렇게 바라고 그래? 


이런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나는 결혼식장에 도착해 있었고, 새로 출발하는 두 남녀의 앞에 서서 이런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거 별 거 없다. 사회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실패한다 하더라도, 니네들 둘이서라도 서로 친구처럼 의지하면서 인생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면 되는 거고, 그 행복한 시간들이 모여 니들의 인생이 되는 거고, 그러면 니들 둘의 인생은 성공하는 거다. 


이런 구라를 늘어놓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제발 바라건대, 결혼식 축사 같은 거 어지간하면 하고 싶지 않으니 다시는 부탁하지 마시라. 거절하기도 민망한 일이다. 


그렇게 뭔가 우울하면서도 민망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앉아 있는데 문자가 도착했다는 벨이 울린다. 신혼여행을 떠나기 직전, 신랑이 보내온 문자였다. 정말 좋은 축사 고맙다고 하길래, 솔직히 말해서 내가 뭔 소리를 했는지 기억은 나냐고 물었다. 그리고 돌아온 답은.. 


 “이 업계 생활 이십 년이 넘은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그간 들었던 주례사 중에서 최고였다고 하시더군요.”


거봐, 신랑 녀석은 내가 무슨 소리 했는지 한 마디도 못 들은 게지. 이럴 줄 알았어.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murutukus

매거진의 이전글 돼지국밥을 시전 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