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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31. 2024

성산일출봉에 이어 오조 지오트레일을

청명한 이런 날씨, 바다와 산을 동시에 즐기고 싶다면?

그리하여 동쪽으로 길을 잡았다.

성산 일출봉 분화구에 봄기운이 얼마만큼 스며들었을까 궁금했던 터.

관광 홍보물 사진처럼 초록물감 쏟아부은 듯한 분화구는 오월에나 만날 수 있지만 삼월은 어떨지 보고 싶었다.

천연보호구역인 성산 일출봉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곳이다.

여전히 청푸른 바다 수반 위에 한 덩이 준수한 수석으로 앉아있는 일출봉.

그 언저리에는 유채꽃 여기저기 꽃방석 되어 샛노랗게 깔려있었다.

산행 들머리부터 관광시즌 다이 인파가 밀려다녔다.

연보라 칡꽃 한창이던 지난해 오르고 한참만에 올라가 보는 일출봉.

이번엔 으름 꽃이 필락 말락, 봉오리가 버블 껌처럼 부풀어 있었다.

날씨는 맑지만 약간의 황사로 시계가 과히 좋은 편이 아니라서, 발치에 있는 성산항 방파제만 윤곽 그린 듯 확실했다.

가까운 식산봉은 대체로 선명하나 한라산은 아슴하고 바다 건너 우도는 그래도 뚜렷하게 보였다.

이처럼 한번씩 뒤돌아 발아래 풍광들 조망해 보며 쉬멍 놀멍 층계를 올라갔다.

높이 182 미터라도 경사도가 있어 약간 숨이 찰 정도라, 시간 셈할 필요 없다 보니 시나브로 올랐다.

드디어 도착한 산정, 사방에서 몰려드는 해풍 어찌나 드센지 날아갈 지경이라 난간을 꼭 잡았다.

눈앞에 빙 둘러 펼쳐진 바다는 청보석처럼 물빛 고왔다.

운두 높은 접시처럼 둥글넓적한 화구 가장자리 돌아가며 솟구친 바위들로 이 빠진 그릇 같은 굼부리.  

예상했던 대로 아직은 묵은 풀이 많아 굼부리 색감은 선명하지가 않았다.

푸르른 새 풀잎 윤기 더해지는 오월에 다시 와보기로 하고 단숨에 산을 내려왔다.

제주의 속살 그 원형과 마주하는 지오(Geo) 투어는 크게 네 지역으로 나뉜다.

동쪽의 성산·오조, 서쪽의 수월봉, 남쪽의 산방산·용머리해안, 북쪽의 김녕·월정 일대다.

그중 이번은 섬이 된 바다(내해)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성산·오조 지질 트레일에 올랐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저 섬에서 한 달만/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처럼 가고 또 가도 정든 님 손짓하듯 발길 다시 이끌리는 곳.

먼저 정상에 잠깐 올랐다가 동쪽 절벽으로 난 해변으로 향한다.

우도가 마주 보이는 언덕 아래 바닷가에 엎딘 해녀의 집까지 내려가 보기로 하였다.

비단풀처럼 바람결에 쓸려 부드러이 누운 억새와 잔디 푸르러 한바탕 달려보고 싶은 충동 일게 하는 언덕길.

벼랑 난간 따라 나있는 길을 줄지어 걷는 사람들 윤곽이 마치, 어서 이리 와 걸어보라고 손짓하 듯했으나 한번도 가지 않았더랬다.

시간 셈하지 않기로 한 이번 기회엔 언덕 끝까지 가서 바다 건너 우도를 망원경으로 한참 들여다도 보았다.

거침없이 비강 훑는 시원스러운 해풍 마주하며 심호흡을 하니 폐부 속속들이 말갛게 정화되는 거 같았다.

거기서 되돌아와 바다로 향해 열린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깎아지른 벼랑에 새겨진 지층만이 아니라 바닷가에 넓게 깔린 암반들이 기어코 허리 낮게 굽히도록 유도했다.

절묘하게 생긴 화산암을 만날 때마다 사진에 담느라 또다시 쭈그려 앉곤 하였 다.

어느 하나도 닮은 꼴 없이 제각각 모양 다른 화산체, 기나긴 일월 지나는 동안 파도에 씻기고 폭풍우에 깎인 기암괴석 조각들.

거친 용암 그대로 굳은 바위도 있지만 넓게 깔린 암반에 난 무수한 포트홀이 무량한 세월을 반추하게 한다.

나뿐 아니라 거개가 발치를 바라보거나 뒷짐 쥔 채 벼랑을 올려다보게 만드는, 역시 지질 트레일 장소다웠다.

이번엔 서쪽 편으로 발길 옮겨 수마포가 있는 광치기 해변으로 향했다.  


여기서 마주 보이는 일출봉 석벽은 깎아지른 수직 단애가 더할 나위 없는 명품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광휘로운 해돋이를 볼 수 있는, 그래서 이름도 성산일출봉.


사람들은 일출봉에 올라 벅찬 해맞이를 하거나 태평양 바라보며 새 희망을 다짐해 본다.


지질 트레일에 오르기 전에도 일출봉에 들를 때면 파도 거듭 밀려오는 검은 모래톱 광치기 해변을 작정하고 오래오래 거닐었다.


비극의 현장 터진목으로 들어가서일까, 광치기 해변 모래 빛깔은 유난히 거무스레했다.


검은색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묵직하게 만든다.


무채색 중에서도 모든 색을 포용한 마지막 색이라서일지도.


즐거운 여행객들이야 언제 적 비극까지 들춰낼 까닭이 없고.


왼편짝에 우뚝 선 성산 일출봉은 수려한 자태의 수석으로 청남빛 물 위에 떠있고 우측 멀리 섭지코지가 우련하게 잡힌다.


일출봉 서쪽 절벽 아래 짙푸르게 펼쳐진 수마포로 진입한다.


바닷속에서 분출한 마그마가 빚어낸 기기묘묘한 화산 지층이 기다리는, 지오 트레일이 시작되는 곳이다.


바짝 다가가서 바라보면 그랜드캐년 협곡 응축돼 쌓인 일월의 나이테처럼 켜켜이 포개진 결 다른 화산석이 압도해 온다.


아득한 신생대 때, 펄펄 끓는 마그마가 바닷속에서 분출되며 겹겹 쌓여 층을 이룬 수성 화산체인 일출봉.


대한민국 천연기념물이자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인증을 받은 귀한 보물이다.


오랜 세월토록 파도에 씻기고 바람에 깎이는 풍화작용으로 기암절벽마다 기기묘묘한 침식 절단면을 이룬 지층들.


바로 이곳, 지질 트레일 코스 따라 걷다 보면 지구 역사와 화산의 퇴적 과정 적나라하게 관찰할 수 있는 야외 지질학습장에 온 기분이다.


이 장엄한 경관에다 일제는 대자연에 아주 몹쓸 해작질을 해놓았다.


일출봉 연안 수마포 해안 절벽 아래 이렇게 콘크리트 구조물의 진지동굴을 필두로 벼랑에도 여러 개의 동굴을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가 해상특공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구축한 동굴진지가 일출봉 밑자락에 줄지어 열려있다.


일본군이 연합군 함대를 향해 자살 폭파 공격을 시도코자, 수상 특공 병기인 소형 어뢰정을 보관하기 위한 격납고다.


그 성산일출봉과 마주한 광치기 해변 또한 제주 역사의 아픈 흔적들이 새겨진 곳.


한 번은, 힘없어 나라 잃고 졸지에 식민지 백성으로 추락한 민초들이라서 겪어야 했던 피어린 아픔이다.


한 번은 일본 패망 덕에 각중에 해방 맞아 건국은 했으나 좌와 우로 갈라진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독스러운 고초를 겪어야 했으니.


건전하고 올바른 국가관 정립은커녕 걸림돌 역할을 한 것은? 극단으로 치닫는 사상과 이념의 도그마만큼 위험한 게 없다.


예나 이제나 선동의 귀재인 좌익들 본진인 남로당의 사주에 의해 촉발된 4.3 소요사태, 유격대의 무장봉기에 맞서 서청과 군경이 동원되고.


희비 엇갈리며 직조되는 삶과 삶의 끝인 죽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피할 수 없는 마지막에 관해 묵상하게 만드는 광치기해변.


대충 개요만 알뿐 실상은 물론 피해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은 쉬쉬하며 숨긴 먼 곳의 얘기였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말처럼 '제주에서 삼킨 고통의 결을 우리는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가 와서 보니 맞는 말 같다.


피아간 누가 누군지 그저 서로 뒤엉켜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양민 학살이라는 만행이 저질러졌으니... 그 평가는 먼 훗날 역사가의 몫.


터진목에서 자행된 4.3 사태의 비극은 자주 회자되나 그보다 더 끔찍하고 처절했던 진지동굴 노역의 고통은 파도에 죄다 쓸려 보냈나?


태평양전쟁 시 총알받이로 삼거나 정신대를 통한 일제 강점기의 만행뿐인가, 영화 속 귀향이나 군함도만의 징용살이뿐이겠는가.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일본열도 꼬나보며 눈흘김이나 할까, 반일 감정 부추기는 죽창가 대신 이제는 극일로 나아가야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오조 지오트레일에 접어들 차례.  성산항 스친 다음 시퍼런 바닷물 출렁대는 갑문 다리 건너 쭉 뻗은 도로를 타고 오조 마을에 닿았다.


성산포는 원래 썰물 때만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섬이었다.


1920년대에 제방을 쌓아 고성리와 연결되고, 뒤에 갑문인 한도교를 만들어 오조리와 이어졌다.


오조마을 깊숙이 파고든 바다는 제방과 갑문에 막혀 내해가 되었다.


성산포구 거느리고 갑문 다리 지나 한 마장쯤 직진하면 올레객 사이에는 잘 알려진 오조해녀의 집이 있는 오조리.


나를 비춰보는 마을이란 뜻의 吾照里이기도 하나 일출봉에 해가 뜨면 가장 먼저 그 빛을 받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오조리에는 식산봉과 지질트레일, 수면 둑길, 원담 등이 있으며 호수처럼 바다가 펼쳐진 내수면이 멋지다.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 바라보면서 오조 포구 빙 둘러 나있는 길을 걷는 오조 지질 트레일은 호젓한 사색의 길이다.


초입에 조개잡이 쉼터가 있듯 물때가 맞으면 바지락을 캐올 수도 있는데 인공적으로 물길 막혔을지라도 만조 시엔 바닷물이 들이찬다.


먹거리 풍부하니 온갖 야생 조류가 모여드는 철새 도래지이기도 해, 갈매기는 물론 왜가리 물닭 흰뺨검둥오리 바다직박구리 물수리 등등.

성산 일출봉을 정면에 두고 내수면 가에 오도카니 선 식산봉, 산 전체가 낟가리 쌓아놓은 듯해 왜구가 겁을 냈다는 오름이다


50미터 높이라 잠시 올라 멋진 한덩이 수석 일출봉을 조망하고 내려온다.


식산봉 오른쪽에 거느린 채 칼큼한 해풍 더불어 반반한 흙길 걸었다.


용암이 검붉게 흘러내렸다가 식으며 널펀펀하게 깔린 해변 바로 옆에 길 제법 한참 이어져 있다.


염습지에서만 자라는 희귀 식물인 '황근' 집단 서식지도 이어진다.


멸종 위기종 2급으로 지정돼 보호받는 황색 무궁화다.


무궁화가 피는 여름이 되면 윤기 나는 노란색 꽃 환하게 피어나는 이곳.


물비늘 세우며 불어 젖히는 바닷바람이 찬 때문인지 오조리 황근은 겨우 순이 뾰쪽 나왔다.


여기서 주목할 거리는 제주 전통 고기잡이 양식인 '원담'이다.


오조리 원담은 원형이 아니라 양식장처럼 뚜렷한 사각형 형태의 현무암 담으로 간조 때나 형태 짚인다.


밀물에 몰려든 고기떼들이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돌담을 쌓아 놓았는데 얕은 물속에 갇힌 은빛 고기가 튀어 올랐다.


포구 언저리 길가에는 노시인 이제하 화실이 있었고 '모란 동백'이란 간판이 붙은 책방도 있었지만 문 굳게 잠겼다.


물가에 유채꽃과 현호색 노랑꽃 흐드러진 조붓한 길 옆으로 제주 용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투뮬러스 지형도 섬세히 드러나 있다.


걸쭉한 용암이 흘러내릴 때 공기에 출된 표면은 응고되고 내부 용암은 계속 흘러가며 만들어진, 부풀어 오른 용암 덩어리다.


제주 토속어로는 빌레라 하는데 그렇게 형성된  표면은 마치 검게 부푼 곰보빵 같다.

이어서 띄엄띄엄 나타나는 촌락, 인적 드문 길은 좀 후미지다.

돌담 두른 밭에는 그래도 완두콩 심어져 하얀 꽃 나부낀다.

원담과 빌레 스쳐 지나자, 뭇 오름 너머 저 멀리 구름 거느린 한라산 웅자도 보였다. 차에 오를 즈음, 노을은 빈 바다에 금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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