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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31. 2024

대정성지 삼세번만에 찾아가다

정난주 마리아

미세먼지로 하늘과 바다 경계 흐릿하고 섶섬 희미할 정도로 시야 갑갑한 엊그제 아침.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가 잠든 대정성지를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유배처에서의 37년 세월, 그것도 관노 신분으로 살다가 생을 마친 정마리아는 삶 자체가 곧 순교, 그를 일러 후세인은 백색순교자라 칭하였다.

대성성지 방문길, 이번이 세 번째 시도다.

처음엔 추사 유배지를 찾은 길에 들러보려 했으나 동네 사람 아무도 아는 이가 없어 방향도 못 잡아보고 그만뒀다.

두 번째는 작정하고 나섰으나 대정우체국에서조차 모른다고 했다.

대정성지에 대한 블로그 글을 보여줬지만 약도도 없는 애매한 주소지라 젊은 우체국 직원은 끝내 고개를 흔들었다.  

심지어 인근에 성지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어렵사리 비로소 그곳에 닿고 나서야 아하~ 과연 그럴 법도 하다 싶었다.

2차선 도로는 휑하니 너르게 뚫려있으나 부락은 전혀 없고 평원에 농장만 죽 이어진, 오지 아닌 오지가 그곳이었다.

마을이 없으니 우편 배달업무도, 더더욱 적금 관련 홍보도 필요 없는 깡촌 중의 깡촌에 자리한 대정성지.  

허허벌판에는 감귤밭과 양배추밭, 비닐하우스와 가건물 같은 농장만 즐비할 뿐이었다.

오가는 차종은 거의가 농작물 가득 실은 트럭이고 어쩌다 승용차가 빠르게 지나쳤다.

도중에 포기할까 망설거리기까지 한, 그렇게 어렵사리 당도한 대정성지.

경내는 잘 다듬어져 있었고 빙 둘러 위치한 십사처도 매 장면 경건감을 더해줬으며 조경수 아름다웠다.

호젓하고 더없이 적요로운 곳이라 십사처 돌며 기도하기에는 아주 마침맞은 장소였다.



얼마 전 육지에서 피정을 온 조카 친구로부터 제주성지라는 팸플릿을 건네받아 이 정도면 충분히 찾겠다 싶어 나선 길.

보통 아침에 일어나 기상상태를 보고 방문지를 선택하는지라 이처럼 시계 나쁜 일기에는 외출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희뿌연 날씨에는, 서른 일곱 해를 적소에서 궂은일 도맡아 하며 깝깝한 삶을 산 분의 심정 가까이 느껴질 듯.

장원급제한 황사영의 손을 정조가 친히 잡아주며 탄탄대로 약조했던 남편과 당대 최고의 학자를 아버님으로 둔 정마리아.

대학자들의 맏형이신 아버지 정약현의 형제 세분은 수형인이 되었으며 자신과 아들조차 절해고도 귀양처로 내몰려 욕된 세월을 견뎌내야 했던 정마리아다.

출세하여 누리는 부귀영화의 헛됨을 절절히 목도한 그녀의 원은, 차라리 자식이 양반보다는 상민으로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사는 삶이길 바라마지 않았으리.


어느 뉘있어 감히 당시의 그 절박함과 간절함을 헤아릴 수 있겠으며 애간장 끊어지는 단장의 아픔을 어찌 그려낼 수 있으랴.

감내하기 힘든 혹독한 형극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의 비애를 어이 둔한 필설로 풀어내랴 싶기만.

그 와중에도 그녀가  모진 삶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혈육 하나 그래도 바다 건너에서나마 소년 되고 청년 되어 감을 지켜보는 낙이 있었던 까닭이리라.



팸플릿에 문의처로 나와있는 모슬포 성당은 어쩐 일인지 도통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모슬포까지 가서 관할 성당에 들어갔더니 직접 가본 적은 없다는 수녀님이 대정성지 약도만 폰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다시 대정읍으로 나와 수소문 끝에 마을 이장집에 가 문의해 본 결과 걸어서 갈 거리는 아니라며 택시를 타라 했다.

맘먹고 하는 성지순례를 차에 실려 휑하니 간다는 건 말이 안 돼, 가는 길만 자세히 알려달라 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먼 길인데... 괜찮겠어요? 한다.

거리가 먼 건 괜찮지만 산길 같은 험한 곳은 아니냐 묻자, 훤한 신작로 길을 따라 사십 분은 족히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쯤이야 별거 아니네 뭐! 싶은데, 대관절 얼마나 걷기를 싫어하면 촌사람들도 한 시간 미만의 거리조차 걷는 걸 겁내는 걸까.

미 대륙에 사는 사람들만 자동차가 신발 역할을 하나보다 했는데 이 조그만 섬 안의 사람들도 차 없이는 나돌아 다니지 못하는 듯.   

나만 구석기시대를 사는 천상 원시인인지도?

현재 대정은 4차선 훤하게 뚫린 번다한 마을이지만 그러나 조선시대의 대정현은 중죄인들을 귀양 보내는 유배처였다. 


정마리아는 1840년 귀양 온 추사와는 사십 년 차이를 두고 그보다 일찍이 대정현에 귀양 왔다.

그녀는 1801년 제주도로 유배와 기나긴 세월 로 지내다가 선종, 제주 남단 모슬봉과 마주한 곳에 잠들었다.


후대에 이르러 '신앙의 증인'으로 추모하는 분이지만 천주교 박해 때 남편을 잃고 나이 스물아홉에 대정읍 관비(官婢)가 된 그녀다.

그녀의 숙부인 정약전·정약종·정약용, 외숙 이벽, 고모부 이승훈 등 18세기 조선의 최고 지성들을 보고 자란 정 마리아다.

정약용은 정조의 두터운 신임이 송구해 잠시 천주교를 버리고 성리학에 몰두했으나 결국 정조 승하 후 강진으로 유배당한다.

가까스로 죽음만은 면한 정약전도 흑산도로 귀양 와 <자산어보>를 남김과 동시에 흑산 마을에 천주교를 전파시켰다.

피의 순교자가 된 셋째 숙부 정약종의 가족은 아내 성녀 유체실리아, 장남 정철상복자, 차남 성정하상바오로, 성정정혜엘리사벳이듯 성가정의 모범이 된다.

제주가 맞이한 첫 신앙인으로 기록된 그녀는 처지가 급락했을지라도 명문가 집안에서 자라 배필로 조선 최고의 천재를 맞았던 그녀였다.

험한 지경에 이르렀을지언정 사대부 가문의 위엄을 잃지 않고 풍부한 학식으로 ‘한양 할머니’이라 불리며 살았다는 그녀다.
  
아들 하나를 살리기 위해 배교까지 하는 독한 결단을 해야 했고 종당엔 자식을 버리기까지 해야 했던 한 여인의 절절한 고뇌.


정 마리아는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 채 두 살 난 아들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라 어린 아들과 추자도에서 생이별해야 하는 어미로서의 쓰라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추자도 황새울 바닷가에 떼놓았던 아들은 어부 오 씨(吳氏)가 거두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키워졌으며 후손들이 현재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

대성성지 경내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있다.

“신앙의 불모지인 이 땅에 신심을 증거한 정 마리아는 1773년 나주 본관 정약현(丁若鉉)과 경주 본관 이 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나 명연(命連)이란 아명을 받았다.  성품이 온순하고 영특하여 난주(蘭珠)라 불렀으며 일찍이 세례 입교하였다. 1791년 황사영(黃嗣永)과 혼인하여 1800년에 경한(景漢)을 출산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와중,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남편은  능지처참 형을 받았다. 그 결과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에, 정 마리아는 제주도에,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머물게 되었다. 정마리아는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이웃들의 칭송을 받으며 살다가 1838년 음 2월 1일 병환으로 숨을 거두자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고.




차량 이용 시는 친절한 네비를 따르면 되겠으나 도보순례자를 위한 아날로그식 길 안내를 하자면...

대정읍에서 대정 농협을 찾은 다음 아래 사진과 같은 남문지 연못 위 정자와 인성리라 새긴 자연석을 만나면 첫 입구는 찾은 셈.

남문지 앞에서 중앙도로 건너 바로 맞은편 간선도로(칼텍스 외엔 주변에 기준 삼을 건물이 없음)로 접어든 다음 농장 사잇길 하염없이 직진, 삼십 분 정도 걷다 보면 사거리가 나온다.

인근은 교통량도 제법 많아 반짝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사거리에 닿으면 오른쪽에 비로소 대정성지 안내판이 나오는데 너무 낡고 색도 바래 오직 방향 표시만 알아볼 수준이다.

그래도 농장 돌담 따라 동백꽃 붉게 펴 그 길 걷는 내내 콧노래 흥얼흥얼 행복감이 차올랐다.

왼쪽으로는 모슬봉 인근 공동묘지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 난 반듯한 신작로를 따라 농장만 펼쳐진 황량한 시골길 십오 분쯤 걸어가면 위 안내표지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 길을 걸으며 거듭 느낀 점, 성지순례길은 고통이 따르는 게 제격으로 묵상의 시간 성찰의 시간 저절로 마련됐다.


지번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10

도로 주소: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247번길 102(대정읍 보성상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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