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Mar 31. 2024

뉴저지 쟌다크성당 한인공동체 스토리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한용운 님의 시 <인연설>처럼 모든 인연은 아름다운 걸로 알았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인해 아름다울 수 없는 인연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선업을 쌓으면 선연을 짓게 되고 악업을 쌓으면 악연을 만나게 된다고 하였다. 하여 올곧고 선하게 살고자 지향하는 우리. 그러나 가끔은 모호한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선과 악의 규정은 윤리도덕적 가치관에 기초한 나름의 자기 판단에 의하여 정해진다. 옳다는 자기 신념, 그 오만과 독선으로 인해 더러 오류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보편타당성을 지닌 선과 악의 테두리, 그 안에서의 선연 악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여지껏 나는 통상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만 있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주기만 하는 사랑, 더 많이 줄 수 없음에 아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쩌르르 아픈 인연, 진땀 나게 힘든 인연, 등 돌릴 수밖에 없었던 괴로운 인연도 있었다. 그랬다. 다시는 짓고 싶지 않은 참으로 편편치 않은 거북한 인연, 고약한 인연으로 다수가 눈물 흘려야 했던 사건이 체리힐에서 발생했다. 삶에 있어 본질적이고 직접적으로 연계된 현실문제가 아닌, 그것도 마음의 평화를 위해 선택한 신앙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갖게 되다니 참 기괴한 노릇이었다. 주일마다 만나던 다정한 교우들끼리 사제의 거취문제를 두고 극명하게 패가 나뉘었다. 갈등의 골은 깊게 파이고 적군이듯 서로 반목하며 척지게 되었다. 그 당시엔 자꾸만 중세의 종교전쟁이 떠올랐다. 실제 무기만 들지 않았을 뿐 살벌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2년여 전, 신교에서 더러 불거지는 사태로 인식한 목회자 축출 시도가 가톨릭 안에서 발생했다. 이민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였다. 일부의 악의적인 선동질로 교회 내 분규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 바람에 기본원칙대로 교리만을 고지식하게 따르던 우리는 정신적 안식처인 한인교회를 떠나 각자 가까운 미국성당을 찾게 됐다. 미래가 불확실한 채로 빈손 되어 황야에 나선 그 사건 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는 다시금 한마음으로 뭉쳐 교민사회에 새 모델이 되는 참다운 한인공동체를 만들어냈다.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준 쟌다크성당 내에 그렇게 새 둥지를 틀고 우리는 하나가 되어 신실한 신앙인으로 힘차게 평화의 행진을 이어나갔다. 뉴저지 남부 말톤과 체리힐 지역을 아우르는 새로운 한인공동체인 우리는, 그렇게 말썽 많고 잡음 많은 한인커뮤니티에 실망하고 미국성당으로 와 지금껏 평화로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미국인과 함께 하는 미사와 한 달에 한 번씩은 트렌톤 교구에서 촉탁해 파견되는 한인사제의 한국어 미사에 감지덕지하면서.



2008년 9월 8일, 쟌다크성당으로 옮겨 온 우리는 첫 미사에 참례하며 흐르는 눈물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태에 걸친 일련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빠르게 돌아가는 필름. 북받쳐 오르는 감회로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졌다. 우리의 새 보금자리가 미국 성당 안에 자리잡게 된 것은 지난해 9월의 일. 광야에서 유랑하는 우리를 쟌다크성당이 흔쾌히 소속 공동체로 받아들이면서 신자 등록을 하고 그 후 하나로 움직였다. 우리 모두 이날이 있기까지, 이 시간이 마련되기까지 퍽이나 고단하고 힘겨웠던 그간의 여정. 많이도 쓰라리고 아팠다. 그러나 돌이켜 오직 감사, 거듭거듭 감사! 공동체에 소요가 일며 균열이 생기기 전, 본래 전체 백십여 명 남짓했던 교우 숫자에서 그중 적지 않은 73명이 잔다크성당 첫 미사 자리에 함께하게 됐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여기서 더 욕심은 갖지 않겠다 다짐들을 했다, 한국어로 진행되는 미사허락 여부도 다 그분 뜻에 맡기기로 했으니까.



이스터를 가까스로 겨우겨우 지낸 4월 6일을 잠시 돌이켜 본다. 현지인인 한인부제를 중심으로 입맛대로 사제를 바꿔 치려는 영어권의 드센 교우들이 모사를 꾸미는 와중. 은퇴 앞둔 전임 노사제는 이미 눈물 흘리며 떠났고, 영문도 모른 채 한국에서 새로 부임해 온 사제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팔을 움직이지 못했다. 거양성체조차 못할 정도가 되어 침술치료를 받아가며 일 년여를 고통스럽게 지냈다. 사람이 무섭습니다, 가슴에 사무치는 말을 끝으로 그분은 느닷없이 미국 교구청의 발령에 따라 바닷가 작은 공소로 떠났다. 주인 잃은 난파선에 들끓는 게 무엇? 가증스러운 쥐떼였다. 그렇게 다시 우여곡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일방적으로 폐기된 캠든교구의 약속에 분노했으나 우린 묵묵히 순명했다. 그리고 알았다. 교구에 더 이상 걸어 볼 희망이 없다는 걸.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우리는 빈손으로 조용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그 후 일요일마다 한 시간이 넘는 바닷가 공소까지 모두가 한마음 되어 오갔다. 평화만 허락된다면 그걸로 족했다. 허나 먼 거리 마다하지 않은 우리의 평화행진은 만 넉 달만에 마무리되었다. 한국 측에서 파견 보낸 사제를 되불러 들이면서 다시는 체리힐에 사제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



때론 침묵이 폭력보다 더 겁나는 위력을 발휘한다. 리더가 달리 있었던 것도, 누군가가 호소하며 외친 것도 아니다. 각자의 판단에 의거 일치된 행동으로 뭉쳤다. 항용 최종승리는 술수에 능한 자 차지가 아니라 정의에 입각한 용기 있는 자의 몫이다. 여기서 누구의 잘잘못을 판단하자는 것도, 단죄하고자 함도 아니다. 상과 벌을 나누고 시비를 가리시는 분은 하늘에 계시다. 옛말에 억울하게 맞은 사람은 다리 펴고 자도, 때린 사람은 오그리고 잠들 수밖에 없다는 속담 그대로다. 누군가 지금은 심히 난감한 처지가 됐을 터라 쯧쯧~측은지심마저 든다. 그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오체투지 낮게 엎드려 바친 순명의 첫 서원 잊은 채 세상사 달큰함에 무너뜨린 큰 약속. 유혹 물리치지 못한 죄, 돌이켜 어서 속히 하늘 향해 무릎 꿇기를.... 어머니 앞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 되기를.... '접근금지 8년 그리고 희망'이란 농간 주동자의 자기 고백서가 지난 허물 증명하고도 남듯이 기나긴 8년 세월, 같은 길 걸어갈 선후배를 실패자 낙오자 만들어 눈물 흘리게 한 잘못 용서 청하기를... 밀과 가라지는 추수날 반드시 가려져 가라지는 불속으로 던져지게 된다,



그 후 우리는 한마음으로 쟌다크성당의 아홉 시 미사에 전원 참석했다. 곧이어 하느님께서 11월 둘째 주일에는 우리의 한국어 미사를 허락해 주셨다. 매월 두 번째 일요일 오후 4시 한국미사, 예상외로 빠른 진전이었다. 두 손 들어 모두들 감사함에 환호하면서 그 기쁨을 나눴다. 그리 쉽게 문이 열리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에 큰 은총 내려주심에 감루를 흘렸다. 뜻밖의 은총에 감격하면서도 그러나 마냥 그 기쁨에 도취될 수만은 없었다. 산 넘어 산, 풀어야 할 숙제가 또 있었다. 공동체에는 연로하신 분이 여럿 계신 데다 젊은이들은 노부모를 모시고 있었다. 언제 상사를 겪을지 모르는데 장례미사는 어떻게 하나, 말들은 아껴도 흉중이 무지근했다.



하얗게 눈이 쌓인 지난 2월, 루갈따 할머니의 장례미사가 잔다크 성당에서 있었다. 그분 뜻대로 잠언 3장을 그분 가시는 마지막 길 독서대에서 들려드렸다. 그분은 떠나시면서 무언 가운데 우리에게 큰 선물을 남기고 가셨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라. 주님께서 다 문을 열어주실 것이다." 2009년 2월 4일, 강 루갈따 할머니의 장례미사는 쟌다크 성당에서 리치 신부님 집전으로 엄숙하고 장엄하게 치러졌다. 명실공히 본당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지 불과 5개월 만의 일이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우여곡절은 언젠가 소설로나 써질까, 아직은 교계의 치부를 공개하기도, 또 섣불리 결론을 내릴 단계가 아니라고 본다. 하느님께서는 인과에 따라 양과 염소를 이미 구분해 놓으셨을 것이므로. 그것은 그분의 몫으로 전 과정의 흑과 백, 명과 암은 언젠가는 분명히 가려질 것이다. 사필귀정, 죄는 지은대로 받고 덕은 쌓은 대로 간다 했으니까.



그해 겨울이 깊어가면서 팔순 고령이신 루갈따 할머니의 노환도 깊어져 갔다. 병 수발을 위해 어렵사리 장기휴가를 낸 수녀님이신 큰따님이 가정간호를 도맡았다. 귀국날짜가 거지반 다가왔다. 당시 수녀님으로부터 영세자 교리공부를 받던 두 학생을 대동하고 할머니 댁을 자주 드나들었던 나는 할머니께서 생명의 불길이 점점 사위어듦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기름을 다 태우고 마침내 등잔불의 심지가 가물거리듯 불꽃은 흔들리며 약해져 갔다. 통증 극심하다는 위암말기임에도 고통은 전혀 없으셨고 의식은 초롱했다. 다만 눈을 뜨는 것마저 힘에 부치신 듯 자꾸만 눈을 감으셨다. 우리를 북돋아 격려해 주시던 그분, 모든 것 다 하느님께 맡기고 앞만 보고 똑바로 걸으라시며 음으로 양으로 힘찬 성원을 보내시던 깐깐하신 어른. 우리가 한참 힘들 때 그 약하신 노인네가 우리 공동체를 위해 철야기도를 하신 분이다. 늘 손에서 떠나지 않던 묵주... 반드레 윤나고 검으레하게 손때가 묻은 묵주. 구정 설을 맞아서는 떡국국물을 맛나게 드셨고 교우가 만들어 온 식혜물을 달게 받아자셨다. 생신상도 조촐하나마 받으셔서 케이크를 앞앞이 권하기도 하셨다. 평소 좋아하신 성가를 불러드렸다. '자모신 마리아 축복하소서. 이제와 영원히 평화케하며....'



입춘을 며칠 앞둔 2월 1일은 그달 첫 일요일이기도 했다. 미사를 마친 후 교우들 여럿이서 할머니댁을 방문하였다. 숨소리는 고르나 미약한 호흡, 맥박은 잡힐 듯 말 듯 희미했다. 할머니 손에 쥐어진 묵주가 자꾸만 흘러내렸다. 그분이 가장 좋아하신다는 묵주기도를 다 함께 염송하며 우리의 간원도 더불어 바쳤다. 따님의 연기받은 휴가 마감날짜가 임박해 있었다. 따님이 한국으로 떠나신 뒤 눈 감으시면 어쩌나. 내심 조바심이 났다. 정오가 조금 넘어 우리는 할머니 손을 한 번씩 잡아드리고 일어섰다. 오후 2시가 지나자마자 루갈따 할머님 선종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 왜 그 순간 하느님 감사합니다, 가 절로 터져 나오며 깊이 고개 숙여 합장하였는지.. 쿡 받치는 슬픔이기보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앉았다.



평화로운 임종이었다고 한다. 말치레가 아니라 기도로 끼니를 삼으신 그분이야말로 당연히 그래야 마땅하다. 맏따님의 간곡한 기도와 지성 어린 보살핌 속에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간들을 평온히 보내며 행복해하셨을 할머니. 전 교우들에게 연락이 닿아 검정 옷차림끼리 어깨를 비비며 촘촘히 끼어 앉아 '제 잘못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제 허물을 깨끗이 없애주소서~'연도를 바치고 돌아오는 길. 밤하늘 가득 눈발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겨울의 끄트머리, 그처럼 탐스러운 눈송이는 흔치 않았는데 참으로 특별한 밤이었다. 흰눈 송이송이들은 마치 오늘 불러가신 영혼을 하늘이 축복하는 듯하였고... 할머니의 영혼이 우리 모두의 어깨를 부드러이 감싸주시는 듯한 기분을 우리 모두는 느꼈다,



동시에 교우 동정을 본당에도 알리며 추후 일정을 상의했다고 한다. 몬시뇰 리치신부님은 응당 장례미사는 본당에서 올려야 할 것이며 몬시뇰께서 직접 집전하시겠다면서 세부절차를 알려주셨다 한다. 그전 뷰잉예절에도 참석하여 고인을 위해 축도해 주시고 남은 가족들을 위로해 주시던 신부님. 천국문이 절로 열릴 것 같은 리치신부님의 장례미사 집전은 장엄하고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따습게 데워진다. 할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쟌다크성당에서의 우리 자리를 공고하게 굳혀주셨고 우리 모두 인간적 갈등을 넘어 모쪼록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이해하고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무언의 당부말씀을 남기시고 떠나셨다. 할머니는 그처럼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셨다, 사랑의 끈으로 굳건하게!


작가의 이전글 대정성지 삼세번만에 찾아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