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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31. 2024

그분 뜻대로

웰다잉

근자 들어 한국인 중에도 스위스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이가 더러 있다고 다. 회복불가의 불치병으로 고통받느니 자발적으로 안락사를 택해 생을 마감하려는 희망자가 늘고 있는 추세에 따른 선택지의 하나다. 스위스의 비영리단체인 디그니타스(Dignitas)에서 이 서비스를 제공해주고 있어서다. 나라별로 안락사를 인정하는 몇몇 국가가 있으나 한국은 불법에 해당된다. 미국만 해도 꽤 여러 주에서 이를 허용하고 있다. 십여 년 전에는 어림도 없었건만. 세태는 변하고 또 변했다. 이제는 미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알아서들 해두고 있다. 백세시대를 맞았다지만 골골 질병에 시달리거나 기약 없이 중환자실에 누워서 지내야 한다면 글쎄? 심신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해도 나이 들어 갈수록 웰다잉이 화두가 되는 이유다.


십여 년 전 한국 뉴스에서 식물인간 상태인 70대 노인에 대한 존엄사 판결 내용을 들어본 바 있다. 비록 현재 의식은 없지만 그것이 평소 그의 생각이었기에 소신대로 존엄사를 허용한 것이다. 중환자실을 방문할 적마다 느끼는 일로, 정말이지 살아있는 삶이라 할 수 없는 참담지경을 대하면 차라리 고이 눈 감는 편이 훨씬 낫겠구나, 싶은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무의미하게 생명의 시간을 연장하는 대신 품위를 잃지 않고 구차스럽지 않게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는 존엄사. 그것이 제도적으로 옳게 정착된다면 바람직스럽지 않을지.



 2003년  그때도 사순 시기였다. 식물인간이 되어 열다섯 해째 누워 지내는 플로리다의 한 여인을 두고 미국 조야가 안락사 허용 여부로 갑론을박 뜨겁게 달구어졌다. 안락사라니, 절대 안 된다. 어떤 이유나 상황을 불문하고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아니다. 경우에 따라 편안히 죽을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생명이 우선인가. 죽을 권리가 먼저인가. 과연 그분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뇌를 다쳐 인지적 신경 기능을 상실한 그 여인은 영구 식물인간 상태였다. 외부 자극에 눈을 깜박이거나 울고 웃는다지만 그 감정 표현은 단순한 신경 반사작용에 불과하다고 의료진은 진단한다. 깨어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래도 부모는 특별한 기적을 기대하며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아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주지사는 인도적 차원에서 그녀를 살려야 한다며 주법원이 결정한 안락사 허용에도 불구하고 ‘테리의 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오 년 넘게 식물인간으로 병상에 누운 가망 없는 환자인 아내. 그녀 남편은 깨끗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며 항소법원에 재차 안락사 허용을 신청했다. 결국 플로리다 주 법원으로부터 안락사 신청이 받아들여져 급식 튜브 제거 허용 결정이 나며 음식 공급이 끊기게 됐다. 그러자 미 전역의 생명 단체와 기독교 단체들이 강력하게 안락사 허용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녀가 누워있는 호스피스 병동 앞에서 침묵시위 통곡시위도 벌어졌다. 이번엔 연방정부까지 나섰다.



언뜻 <라이언 일병 구하기>란 영화가 떠올랐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광야에서 헤맬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나라. 끊임없이 전쟁을 일삼는 나라임에도 참 위대하고 대단한 휴머니티다. 자국민이 아닌 세상 모든 형제들에게 그 인도주의, 그 박애 정신이 적용되는지에 이르러선 냉소를 머금게 할지언정. 아무튼 부활절 휴회기간에다 일요일임에도 이례적으로 미국 상하원이 긴급회의를 거쳐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특별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부시 대통령까지 휴가를 중단하고 급거 크로퍼드 목장에서 백악관으로 돌아와 그 법안에 서명했다.



그리하여 순전히 그녀 자신의 문제임에도 자기 자신은 핵심에서 제외된 채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일단 생을 연장받게 됐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살이가 낫다고는 하지만 그 누가 죽어봐서 저승을 아는가. 식물인간 상태로라도 계속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의 연장일지 고통받는 시간의 연장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령, 그 입장에 처해진다면 그렇게라도 이 세상에 살아남기를 바랄까. 역시 무엇보다 먼저 그녀 위치에 서 보는 것이 요하리라. 부모도, 남편도,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그녀도 아닌 오직 그녀 자신, 비록 의사 표현은 불가능하나 삶의 주체인 그녀의 관점에서 일이 처리되는 것이 가장 합당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극히 인간적인 연민 어린 동정심이나 인도주의에 입각한 박애심 이전에 그녀라면 과연 무엇을 택했을지를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겠다. 어떤 결론이 옳은지 그른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신다.



인간 개개인은 이 우주의 중심이다. 아니 우주 그 자체다. 각각이 그만큼 소중한 존재다. 그러나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이다. 그녀는 의식을 놓은 채라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고 결정할 수도 없다. 숨은 붙어 있으되 옳게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비참한 일은 바로 그 점이다. 물론 아무리 비참한 삶일지라도 그것을 누구도 빼앗아 버릴 권리는 없다. 그 권한을 가진 분은 따로 계시다. 우리는 고통이든 은총이든 그분이 주시는 대로 받아 안고 살아갈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점차 세태의 흐름은 생명 존중에 맞춰지는 추세다. 하다못해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할 중범죄자에게 가해지는 사형제조차 폐지를 부르짖는 세상이긴 하다.

 

하느님 모상대로 지어진 인간은 존귀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인명은 귀중한 것이다. 생명은 존중받아 마땅한 가치가 있는 것. 佛家에서는 인명은 물론이고 모든 생명 있는 것 나아가 유정 무정까지 아우르는 중생계 모든 것에 대한 대자비를 가르친다. 자비심은 곧 사랑이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시적 언어가 아닌 하나의 행동이다. 결국 존재하는 것 모두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이해 그리고 하나 되기가 사랑이다.



생사문제에 관한 한 단순 명쾌한 정답은 어디서도 얻을 수 없다. 사는 법도 다 모르는 데 죽는 길에 대한 해법이나 비책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다.  단, 안락사든 존엄사든 그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간과해선 아니 되는 건 객관적이고도 이성적인 결정과 선택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나 <더 노트북>은 비감하나 의연하게 승화시킨 마무리란 생각이 든다. 종교적으로는 지탄받을 행위일지언정 죽을 권리를 인정하고 안락사를 도와주는 용기 있는 결단을 보며 숙연해했던 기억. 물론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다. 감히 그분의 영역에 외람되이 개입하긴 했어도 그 남자의 뒷모습이 깊은 감동의 여운을 남기는 것은 그 이유에서다.



사십 대 때 ‘미리 쓴 유서’란 주제가 붙은 글을 청탁받은 적이 있었다. 죽음을 상정해 놓고 미리 쓰는, 딴에는 심각한 유서다. 처연스럽다기보다 왠지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그건 말장난에 지나지 않고 분명한 건 나이가 들면 세상과 등진다는 사실이다. 죽음에서 자유로운 생명체란 결코 없으므로. 生이 있은즉 死는 필연이다. 하건만 우리는 어린왕자처럼 초연히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승처럼 열반송을 읊고 태연히 떠나지도 못한다. 두려움 없이 이승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우리다. 입으로는 헌 옷 벗듯이 또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듯 그렇게 가는 곳이 저세상이라 하면서도 말이다.



그때 원고지 열댓 장 분량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더랬는데 지금 기억나는 것은 품위 있게 죽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존엄사다. 유서는 통상 사후 재산 문제를 거론하게 되지만 그쪽은 별 해당사항이 없으니 그저 떠나기 앞서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만일의 경우가 생긴다면 고통 없이 편안히 갈 수 있게 도와주되 연명치료는 절대로 원치 않는다고도 했다. 지금이라면 단 두 줄로 충분하다. 제 모든 걸 주관하시는 하느님, 당신께 저를 오롯이 맡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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