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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31. 2024

아아, 사람아!

문화혁명

<산사나무 아래>라는 중국 영화를 다시 보았다. 개방정책으로 단숨에 경제대국이 되어 흥청거리는 사이 기존의 가치관이 실종돼버린 중국. 과도한 신자유주의의 폭풍 속에서 사람들은 몸살을 앓는다. 그러니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낄 만도 하다.


영화 <산사나무 아래>는 문화혁명이 막바지로 치달리던 7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박하고 순수한 사랑 이야기다. 출신성분으로 인해 정치적 탄압 속에 청소 일을 하며 어렵게 사는 집안의 소저. 지질탐사대에 동원된 청년은 특수광물의 독성물질에 노출되므로 불치병에 걸리는데 여기서 조건 없이 맑은 남자의 순애보가 기어이 눈시울을 젖게 만든다.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의 피와 눈물의 흔적을 썼고, 비틀린 영혼의 고통스러운 신음을 썼고, 암흑 속에서 솟아오른 정신의 불꽃을 썼다." 이는 두텁고도 빡빡한 책 <사람아 아, 사람아!> 후기에 적힌 작가의 말이다. 실은, 우중충한 기에 묵직한 독서기를 올리기 저어 돼 일부러 묵혀둔 포스팅이다. 그러나 영화를 본 참에 중국 사정을 빌려 근자의 우리 입지와 대입시켜 보면서 한마디 운을 떼고 싶었다. 적어도 우리가 현재까지는 감사하게도 자유민주주의라는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다는데 대해서 말이다. 걸핏하면 소요를 일으키는 한국의 일부 선동꾼들 같다면 폭동을 일으켜 수차례 나라를 뒤엎고도 남을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됐던 중국.

가령, 당(국가)에서 타도 대상으로 꼽는 반혁명분자나 지주, 자본가, 지식인, 우파 등 출신성분 때문에 반동으로 몰려 찍소리도 못하고 숙청당한다면? 금쪽같은 내 자녀가 학교에서 기예단에 뽑혀 밤낮없이 서커스 단원 같은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면? 혹은 내 피붙이가 근로대로 선발돼 집단농장에서 험한 노동을 어거지로 하게 된다면?下放 운동이란 당명에 따라 졸지에 낯선 깡촌으로 강제 이주 당한다면? 하방운동은 1970년 중국에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인구 1만 명 정도의 시에서 5천 명을 추려 농촌으로 내몰았던 실제 사업이었다.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살던 터를 꼼짝없이 떠나야만 했다.



언젠가 한 대학생이 쓴 '안녕하십니까?'란 대자보가 한국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니들이 도대체 뭘 알아? 외치고 싶었다.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고 콩기울 죽으로 연명했다는 대동아전쟁 (2차 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한국전쟁이 터지며 어떤 고초를 견뎌내야 했던가. 난리 통에 살아남은 사람은 제각기 구사일생이나 천명으로 간발의 차이를 두고 겨우겨우 목숨을 건져 살 수 있었다는 증언을 박완서 작가로부터 들었다. 누구나 생명 받아 한세상 살아낸다는 건 결코 녹록지도 순탄치도 않은 일.   

한참 전 일이다. '헬 조선'이란 자조어가 한국을 휘덮었다. 어이없었다. 이런 일련의 소요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라도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것을 천만다행이라 여기는 사람 중의 하나다. 누가 뭐라 생각하건 한반도 남쪽 태생인 것을 행운 중의 행운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다 요즘 중국 사회상을 접하며 아시아에서 가장 너른 영토를 차지한 그 땅 어딘가에 내 삶이 놓였더라면? 상상만으로도 끔찍스러웠다.


현재 중국이 G2로 부상한 경제대국일지라도 그곳 국민으로 점지되지 않은 천우신조에 감사한다. 만일 그곳에서 태어났다면 50년대 '대약진운동'의 희생물이 되었거나 60~70년대를 광풍으로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을 온몸으로 겪으며 격동의 시대를 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영화 속 산사나무 시대 배경인 70년대 한국에서 우리는 LG를 다니며 중산층 소리를 들었다. 헌데 동시대에 그것도 바로 지척인 이웃나라에서는 그런 비극적인 삶이 다반사였다니....


아무리 역사란 뒤엎고 뒤집혀진다는 단 두 마디가 전부라지만 중국 근세사야말로 가관이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해 권력 일선에서 퇴진했다. 그 뒤를 이은 류사오치 등의 실용주의 정치가들이 실권을 잡고 예전 자신의 과오를 수정하는 모습에서 권력에서 소외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자 심한 분노와 권력욕에 빠진다. 이에 아직 자신에게 남은 정치적 카리스마를 악용하여 정, 관, 군부의 권력 중심에 있는 이들을 숙청하고 권좌를 재확립시킨다. 하나 결과적으로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선동된 군중과 '4인방' 등을 이용해 자신이 세운 국가를 자기 손으로 망가뜨린다. 광기가 휩쓴 10년 사이에 수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당하고 서적들이 소멸돼버렸다. 그때 앞장섰던 홍위병들.  

<사람아 아, 사람아!>의 작가 다이허우잉은 상하이의 화둥 사범대학 중문학부를 나왔다. 상하이 작가협회 문학 연구소에서 문학활동을 하다 1966년 문화대혁명과 함께 혁명 대열의 전사로 참가했다. 거기서 '검은 시인'으로 비판받던 시인과의 비극적인 인연으로 반혁명 분자로 몰려 숱한 우여곡절을 겪는다.


문혁의 광기 속에 그녀는 인민들 앞으로 끌려 나가 목에 명패를 건채 자기비판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집단으로부터 언어와 신체폭력을 당하면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더러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또는 이런 막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며 자살하는 경우나 아예 미쳐버린 사람도 부지기수였던 시절. 그 와중에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강제로 이혼을 당하고 하방운동에 의해 농촌으로 내쳐진다. 붉은 소용돌이가 가라앉고 복권되어 1980년부터 대학에서 문예이론을 강의하면서 창작에 몰두, 중국 현대 휴머니즘 문학의 기수로 떠오른 그녀다.



실제 작가 자신의 통절했던 삶의 체험을 소설로 옮겼으나 격동기의 역사가 아닌 인간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살아남기 위해서 지식인들은 동료를 고발하는 일조차 다반사였고 고통을 견디다 못해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살려는 사람도 생겨났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서로서로 자신의 것을 양보하고 나누는 아름다운 미덕을 구현하는 체제가 사회주의라고 굳게 믿었던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홍위병 시대는 모순 투성이었다. 혁명이라는 명분 아래 온갖 부조리가 저질러지자 결연히 반기를 들고 일어서는 바람에 추방령이 내려져 노동자의 삶 속으로 뛰어든 남자. 그가 최우선시하는 가치는 사회주의도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혁명도 개혁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 그는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그 남자는 대학에 갓 입학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뒤로 한결같이 그녀를 향해 연정을 품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고향에서 중학시절부터 좋게 지내온 남자를 배신할 수 없어 동창생들의 시샘 속에 결국 고향 친구와 결혼에 이른다. 그러나 아내가 인민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처지가 되어 나락으로 떨어지자 그게 버거웠던 남편은 야멸차게 이혼을 요구한다. 이혼녀가 된 채 딸 하나를 키우며 나이 들어가는 입장이 되자 다시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그 남자. 그녀를 쏙 빼닮은 딸은 그 남자를 아빠처럼 믿고 따른다. 그즈음 아내를 무자비하게 버린 전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밤마다 눈물의 속죄 편지를 써 보낸다. 어린 딸은 눈물로 호소하는 친아버지에게 끈끈한 부정을 느낀다.

뼛속까지 휴머니스트인 남자는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과의 결합을 포기한다. 아무리 그 아비가 가정을 저버렸다고 해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가오는데, 그리고 버림받았던 딸도 아비의 품을 그리워하는데..... 소설의 마지막은 그녀가 전 남편에게 보내는 기나긴 편지로 마감된다.


과연 그녀의 선택은? 광란의 역사 속에서 사랑과 우정, 이상과 신념은 어떤 운명을 겪어 가는가, 어떤 것이 무너지고 어떤 것이 자라나는가를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20년의 시련 속에서 사랑이 성숙되는 과정은 곧 휴머니즘의 완성 과정임을 보여 주면서 문화혁명이라는 역사적 격동의 심장부를 감동적으로 조명한 <사람아 아, 사람아!>. 무엇으로도 훼손당해서는 안될 인간의 존엄성이요, 휴머니즘임을 그 책은 현 사회 지도층 몇몇에게도 묵묵히 외치고 있다.

동물은 서로 잡아먹을 때에 선언도 하지 않고 구실을 붙이지도 않지만, 사람은 갖가지 깃발을 만들어서 자기를 속이고 남들을 속일 수가 있다. -본문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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