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Apr 03. 2024

서귀포를 어머니처럼 사랑하게 되면-강중훈 시인

서귀포문화예술인 첫 번째 인터뷰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올해 서귀포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강중훈선생. 4‧3을 바로 목전에서 맨눈으로 날 것 그대로 겪고 만 여덟 살 배기는 제주의 역사와 삶을 시로 녹여내며 여기 이르렀다.


"진실을 규명하자는 것도, 누구의 잘못이냐고 캐어묻는 것도, 누구의 책임이라고 탓하는 것도, 배상 보상 문제를 논하는 것마저도 용서와 화해 앞에서는 더 이상 진리일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의연한 모습이 그 일로 구겨지거나 추해지는 일은 없어야 하겠기에 그러합니다. 화해와 상생의 의미가 잘못 정의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아프고 아픈 모든 사연들은 가슴속 깊이깊이 묻어둘 일이며 아물지 않은 상처, 소리 지르고 싶은 고통, 보상받고 싶은 심정 그 모든 것 용서와 사랑과 화해로 대신할 일이라고. 저 피의 바다는 우릴 보고 조근조근 말을 전합니다." 이렇게 4·3칠십 주기에 추모 시를 쓴 강시인을 만났다. 때 이른 토종 동백꽃 소박하게 피었다가 송이째로 툭 떨어지는 매듭달 오후였다.



서귀포의 문화예술인 탐방 시리즈 첫 번째로 모신 강중훈 시인. 성산 일출봉이 마주 보이는 새하얀 삼층 건물, 해뜨는 집에서 인터뷰 자리를 갖게 됐다. 시 감각만 젊은 게 아니라 팔순의 나이가 무색하도록 긴장 팽팽한 청춘인 시인의 풍모에 그만 선기를 제압당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인터뷰이가 바뀌어 불쑥 질문이 치고 들어왔다. 섬이 좋아 서귀포에 거처를 정한 뭍사람이란 소개말에 제주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물었다. 연달아, 제주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아십니까? 제주가 지닌 문화적 특성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연타로 질문 공세를 맞자 그만 얼떨떨해졌다.


육지인들이 제주를 흠앙하는 바는 풍광 좋은 여행지로써다. 그 이상의 의미는 솔직히 별로 없었다. 사철 꽃이 있고 날씨 온화한 제주에 여행객들이 혹하기 시작하며 아예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연예인을 필두로 경제력 받침되는 여유계층이 유행처럼 이주 행렬 줄을 이었다. 코로나로 해외여행길이 막히자 사람들은 자연 국내여행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주는 섬 전체가 천혜의 비경을 고루 갖춰 명실공히 관광자원이 무진장인 곳. 며칠 여행으로는 성이 차지 않은 외지인들은 한달살이 일년살이를 꿈꿔왔다. 그렇게 단기로 살아보기가 붐을 이루다시피 하며 섬은 현지인과 외지인 비율이 반반이란 말이 나돌 정도가 되었다.



고려조 삼별초 최후 항쟁의 거점이었던 제주. 조선조에 이르러선 조정에서 가장 먼 변방이라 유형지가 된 이곳.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고 4‧3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며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힌 통곡의 섬 제주. 일제강점기에는 지정학적 요충지였던 제주를 저들이 군사요새화 시켰다. 전투기 격납고를 만들고 잠수 어뢰정 숨겨놓는 기지로 제주 해변 절벽을 파헤쳐 곳곳에 동굴을 뚫어놨다. 이로 인해 2차 대전 막바지에 연합군은 제주도를 집중 공격했다. 그 와중, 이 땅에서 대대로 착취당하고 핍박받으며 설운 삶 이어온 제주인들이다.


그 까닭인지 제주인의 DNA에는 근면 성실이 기본으로 자리했으며 탁월한 문화와 발군의 두뇌로 사회에서 크게 쓰임 받는 인물도 다수. 한편, 조와 고구마로 곤고하게 살아온 섬을 떠나 시인의 아버지는 일찍이 오사카에서 자리를 잡았다. 강중훈 시인의 출생지는 그래서 일본이다. 해방 한 해 전인 시인이 네 살 때 부모님은 온 식솔을 이끌고 고향인 제주로 돌아온다. 배 하나를 빌려 그간 사용하던 가재도구와 재봉틀을 싣고서. 내 땅에서 안정되이 화락한 생활 누린 것은 시인의 유년기 삼 년에 불과했으며 곧장 거친 4·3 소용돌이에 전 가족이 휘말려 들었다.

바느질 품으로 가계를 도운 모친의 유품

1947년 3월 1일, 삼일절 28주년 기념식이 관덕정 앞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행사 말미에 기마경찰이 타고 지나가던 말발굽에 한 아이가 치이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태연한 경찰에 주민들이 격렬하게 항의하며 돌을 던졌고 경찰은 이에 대응 발포를 해 여섯이 목숨을 잃었다. 그 사건으로 제주도의 학교와 직장이 총파업에 들어가는 등 갈등 국면을 빚게 됐다. 1948년 4월 3일 새벽, 갈등구조를 교묘히 이용한 남로당 무장대가 산에서 내려와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번졌다.


그 무렵 미 ‧ 소 간의 미묘한 계산법에 따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러졌는데 타 지역과 달리 제주도는 투표율 미달로 무효화가 됐다.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인 정부는 섬 전체에 초토화 작전을 폈다. 낮에는 군인과 경찰이 이끄는 토벌대에 의해, 밤이면 산사람인 무장대에 의해 애꿎은 양민들만 희생당했다. 억울하게도 졸지에 무고한 죽음을 맞고 만 셈이다. 제주도 교육장을 지낸 고봉식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남로당에 속한 극소수의 좌익이 군중을 이용했던 것이다. 관에서는 이용당한 주민 모두를 좌익으로 몰았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웠던 섬 제주는 온 데가 학살터로 변했다. 당시 인구 중 1/10이 비명에 가는 악몽 같은 일이 벌어진 이 땅. 성산포 광치기 해변 역시 광란의 살육장이 되었다.


부친과 조부모 삼촌 등 다섯 가족이 터진목 바닷가에서 총검 아래 희생된 참혹한 주검을 어린 손으로 거둔 기막힌 일이야 어찌 잊혀지겠는가. 그 일이 있고도 몇 년을 소년의 가족은 감시 대상으로 살아야 했다. 난리통에 행방불명된 삼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슥한 밤중에 뒷문에서 "형수님" 하며 삼촌 음성을 변조해 동태를 살피는 경찰이 있었다는 데에 이르자 섬뜩 소름이 돋았다. 삼 남매를 거둬야 하는 가장인 어머니는 바느질 품과 해녀 일로 생계 힘겹게 이어가며 버텨왔지만, 그럴 때는 더없이 담대해져 방문 걷어차며 냅다 썩 물러가라고 호통쳤다. 모든 희생자 가족이 그러하듯 비통으로 새겨진 참담한 기억들이지만 시인은 진실을 규명해 단죄하며 상처 후벼 파는 대신 조용히 묻어두고 4·3은 훗날 역사 해석에 맡기자 하였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해원상생으로 풀자 하며 진혼가(鎭魂歌)에 다름 아닌 시를 쓰는 강시인. 제주섬을, 서귀포를 어머니처럼 껴안아 사랑해 마지않는 시인이 그였다. 삶의 어느 순간인들 잊힐 수 없는 어머니처럼.



얼마간의 보상, 선대의 그 핏값보다는 시인은 원했다. 도리대로 바르게 성실히 살면서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 몫 다하고 눈 감아 선대 만나도 부끄럽지 않은 후손 되기를. 이제 4·3 사건에 공소기각이 결정돼 주홍글씨 털어내고 떳떳해졌으니 그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라면서도 말을 아끼는 시인. 서린 한 풀렸고 명예 회복되었으므로 보상이 대수랴, 마디마디 굴곡진 삶 그마저 원망 대신 자양분으로 끌어안았다. 입에 올리기조차 싫은 광기의 시대, 그래도 목숨 부지해 이만큼 삶의 자존감 긍정적으로 이뤘으니 감사한 일이라며 고개 끄덕이는 시인.


4.3을 겪은 제주사람, 제주사람의 영혼은 무엇인가? 죽음 앞에서 살려는 의지가 노역의 순수로 채워지고 또 그걸 뛰어넘을 필요성도 알고 있는, 따라서 과거에 함몰되지 않은 미래지향적인 정신과 사상 그것이 제주사람이며 제주인의 영혼이라고 강조하는 시인. 소싯적 한사코 벗어나려 발버둥질 쳤던 고향마을 오조리. 지금은 사백 명 학살 터 광치기 해변 무시로 바라보며 자신을 바로 세우려는 다짐 되새김한다고. 절대적 신앙의 대상인 어머니는 성산포 오조리 고향땅 그 자체. 해서 공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터 잡은 이 자리는 자신을 늘 어머니 앞에 세운 듯 부지런하게 만들며 사랑 깊게 만든다고.



소년 강중훈은 어제 일처럼 생생한 그날의 비극, 밤을 틈타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던 공포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모호할 정도로 극단으로 치닫던 이념 갈등의 광풍에도 몸서리 쳐졌다. 그 무엇보다도 가난한 살림에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데 대한 좌절감과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배고픔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열여섯에 마침내 그는 섬을 탈출했다. 부산에서 일 년을 버티다가 서울로 올라갔다. 왕십리 무학봉 인근엔 전국에서 모인 근로학생들을 위해 정부가 마련해 준 천막촌이 있었다. 비탈진 산을 넘나들며 신문팔이와 급사 일을 했으나 굶기를 밥 먹듯 했다.


너나없이 궁핍하던 시절이라 콩비지를 사서 소금으로 간을 해 끼니를 잇다 보니 영양실조 상태가 되어 건강마저 잃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에 이르러 결핵과 함께 신경쇠약증이 덮쳤다. 고향으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한 목숨 부지한 것만도 다행이라며 좋다는 민간요법 처방은 뭐든 지극정성으로 구해다 주셨다. 낙향 후 일 년이 지나며 어느 정도 심신 건강이 회복되었다. 서울에서 못다 한 고등학교 과정을 제주에서 이어가던 도중, 전도 학생백일장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제주대학교 국문과 교수인 양중해 선생을 만났다. 그분의 원격지도로 1년여간 문학도로서의 바탕인 시문학 이론 등 문학수업을 사사하였다.



그럼에도 4·3의 악몽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탈제주를 꿈꿔온 그는 출생지가 일본이라 호적초본만 챙겨 들고 일본 밀항을 시도했다. 경남 마산의 외진 포구에서 밀항선을 탔으나 공교롭게도 태풍주의보가 내려져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 후 마음 다잡아 어머니가 정해준 배필과 결혼했으며 9급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스물여덟에 공무원이 되었다. 껄끄러운 질문을 했다.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인데 어찌 공직에 들어설 수 있었느냐고. 강시인은 세상사 다 자기 할 나름이라는 말로 간결하게 답했다. 평소 바른 의식으로 올곧고 성실하게 살아왔다면 처지와 입장이 어떠하든 국가의 공복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는 열리더라고.

1993년 제주도청에서 과장으로 승진하던 해, 비로소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오래 접어두었던 문학도의 꿈을 다시 일깨워 써둔 시편들을 정리해 등단의 문을 두드렸다. 강시인은 '오조리 노래' 등 열 편의 시로 계간 문예지 <한겨레문학> 창간호에서 신인상을 받게 되었다. 천을 한 박재삼, 권일송 시인은 심사평에서 "그의 역량으로 미루어 습작실의 노고와 연진의 나이테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겠다."라며 “압축과 절제의 미학에 근원을 둔 시편들이 풍기는 감동과 언어의 정제는 앞으로 이 시인의 앞날을 지켜보게 한다,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라고 극찬 아끼지 않았다.



내공은 세월만 덧쌓인다고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자질(DNA)이라는 원바탕 위에 긴 수련으로 다져지는 게 내공이었다. 기초공사부터 단단해 그리 지어진 집마다 믿음직스럽고 탄탄하다는 느낌, 몇 편의 시로 대뜸 감이 왔다. 그렇다, 좋은 시는 주춤대지 않고 곧바로 그냥 다가와 스며든다. 결이 비슷한 사람끼리라서일까, 서로를 용케 알아보는 신비한 이끌림과 당김의 법칙이 작용해서일까.


해뜨는 집 정원에서 마주한 낯선 외국인 소조상, 웬일로 프랑스 소설가인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다. 이대 석좌교수로 있던 그는 어릴 때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제주 해녀 기사를 본 적 있어 그 기억을 좇아 제주를 방문했다. 제주의 자연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당시 제주문협 회장이던 강시인을 만나 교류한 후 각별한 인연이 되었다. 2008년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그는 제주해녀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쓴 소설 <폭풍우>를 발표하기도 했다. <폭풍우> 책머리에 '제주 우도 해녀들에게'라는 헌사를 실었으며 명예 제주시민이 된 그는 거의 해마다 제주를 찾는다고.



그의 시집에는 제주 바다가 묻어있었다 / 어렸던 그는 4 ‧3 사건 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를 놓쳐버리고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 나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 제주 먼 나무의 붉은 열매가 눈에 번뜩 들어왔다 / 세월을 반추한다는 것은 뼈까지도 쓰라리다 / 그는 사진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웃음은 세월을 삭였다는 뜻일까, 품었다는 뜻일까. 이는 조성림 시인이 쓴 <해뜨는 집 -강중훈 시인>중 일부다. 삶이 시(詩)이고 시(詩)가 삶인 시인은 서귀포 성산 마을에서 김을 매듯이 시어를 다듬고, 정원을 가꾸듯이 시어를 가꾸며 살고 있다.


 내 안의 나 아닌 또 하나의 나와 공존하며 작가적 상상의 세계에서 오늘도 시를 공글리고 있는 강중훈 시인. 첫 시집 <오조리, 오조리, 땀꽃마을 오조리야>를 비롯 <동굴에서 만난 사람>등 일곱 권의 시집을 냈으며 2014년 제11회 제주도예술인상을, 2017년 제17회 제주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두 시간여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고 해뜨는 집을 나와 성산포 거쳐 노을 지는 광치기 해변에 들렀다. 기명색 석양빛 어린 파도에 자연스레 겹쳐지는 강시인의 시 <고추잠자리> 전문으로 탐방 글 마무리 갈음한다. 보름 후가 되면 2022년 첫날 태양이 성산일출봉에서 눈부시게 떠오를 것이다.


고추잠자리

어디 갔을까

그가 날고 있으면

피를 부르는 소리 들려,

그가 날개를 접고 있을 때

머지않아 그가 몰고 올 피의 세계가 두려워,

고추잠자리 앉아 있는 건너편

메밀꽃이 하얗게 떨고 있는 걸 본다.


작가의 이전글 '동백꽃 피는 날에' 감동적인 무대의 여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