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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5. 2024

반화재(半花齋 )에 국향과 은목서 향 여운되어 스미고


 일현 문학관 반화재(半花齋 ) 현관에 들어서자 금붕어 그림이 어쩐지 낯익었다. 오래전, 가로 늦게 이민을 가면서 옷가방만 챙겨 들었다. 책은커녕 사진 한 장도 짐이 된다며 넣지 않았다. 입주한 아파트 하얀 벽은 말이 되울릴 정도였다. 몹시 휑뎅그렁했다. 흰 벽에 액자 하나만 걸었으면... 마침 한국에서 수필지가 배달되자 그 표지화를 오려냈다. 정성스레 테두리 가위질해 책상머리에 걸어뒀다. 그랬다. 어떤 형태의 구속일지라도 얼, 넋, 혼만은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음은 축복이었다. 선생님께 금붕어 그림과의 사연을 말씀드렸다. '몸은 가두어도 혼은 못 가두리' 란 글귀가 들어있는 그림이었다는 내 부연 설명에, 당시 수필지 표지화를 그린 분이 바로 당신이었노라 하셨다.


이민을 가자마자 처음 뉴저지에선 꽃집을 열었다. 꽃 가게 대목인 밸런타인데이와 머더스데이가 끼어있는 때라 즐겁게 부케와 꽃바구니를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드랍샵이라는 작은 세탁소를 인수했다. 아메리칸드림, 꿈은 역시 꿈일 때 아름다운 것.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엄청났다. 아침에 오픈 사인을 켜면 온종일 일 구덩이에 빠져 매일을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다. 그때 나를 위무해 주던 액자 안의 그 작은 그림 한 점. 작가이자 화가이신 일현 선생을 이렇듯 서귀포에서 만나 뵙게 된 이 인연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물론, 일현 선생과의 '연'을 운운할 계제가 전혀 아니긴 하다. 빼어난 감수성과 관찰력, 정확한 표현력에 더해 끝 간 데 알 수 없는 상상력에 이르면 한마디로 언감생심, 어찌 감히! 다. 놀이 삼아 글을 쓰는 입장에서야 끊임없이 수필문학의 새 경지를 확대해 나가며 치열하게 글과 맞서는 수필작가와는 추구하는 문학관이 다르기도 하다. 일현 선생은 대추알을 '잘 닦은 자마노'라거나 '좌르르 울리는 칠금령' 소리라 표현했다. 연꽃 모습은 '커다란 촛불들' 혹은 '연등 행렬''로 그렸다. 캘리포니아 살 적에 여름마다 양귀비꽃을 가까이서 보아온 터라, 개화 즈음의 기묘한 생태에 신기해했다. 그런데 '마치 번데기의 등을 가르고 막 나온 나비처럼 눈부신 햇빛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는' 표현에 그만 잠시 숨길 멎었다.


삶과 글이 한결같았던 삶의 궤적이 그러해서인지, 차분한 시정과 서정이 알맞게 버무려진 수필의 전범 (典範)과 마주한 며칠. 나는 긴장했고 숫제 의기소침에 빠져버렸다. 그간 일에 매여 살았으면서도 글을 잊지는 않았다. 글을 쓰는 동안은 자신을 억압하는 정신적, 사회적, 물리적 모든 족쇄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었으니까. 글을 쓴다는 것은 환기창을 여는 일이며, 마그마의 분출을 돕는 일이며, 갇힌 물을 방류시키는 일이며, 구원의 밧줄을 붙잡는 일이었다. 불끈거리며 치받치는 감정을, 용솟음치는 내면을, 속내 후련하도록 맘껏 소리쳐 몽땅 다 쏟아내 버리는 일이었다. 표현하라. 터뜨려라, 배설해라, 외쳐라! 여과 없이 가감 없이 매임 없이 진솔하게. 글쓰기야말로 내게 허락된 가장 마지막 자유이고 최후의 보루이자 최상의 권능인 것을. 이런 식의 설익은 글을 써온 자신의 경조부박한 들뜸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금아 선생께서 "손광성의 수필은 한 편 한 편마다 시다."라 극찬하셨다는 수필가를 서귀포 위미리 일현 문학관에서 만났다. 서귀포 문화예술인을 탐방하는 자리, 제주 문화원장인 김순이 시인의 적극 추천도 있었지만 평소 흠모해 왔던지라 만나 뵙고 싶던 분이었다. 손광성 선생이라면 명수필 '달팽이'로 널리 알려진 수필계의 원로이시다. 조선의 꼿꼿한 선비 풍모보다는 중후하고 예의 바른 서구 신사 분위기인 첫인상. 수필 <달팽이>의 이미지대로 그러나 겸손하고 따뜻한 품성이 느껴졌다. 한국 현대 수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시적 산문을 써온 언어의 장인인 일현 선생. 동시에 꼼꼼한 세필로 그리움처럼 아련한 화풍의 한국화를 그려온 화가이다.


1935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열다섯에 월남해서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이어서 80년대 들어 동국대 교육대학원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1985년 제11회 전국불교미술 대전 현대 화부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1992년 첫 수필집 <한 송이 수련 위에 부는 바람처럼>을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했으며 1998년 제16회 현대수필문학상, 그 후 국제 펜문학상, 가천 환경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계간 수필지 <에세이피아>를 창간하므로 일부 수필계의 부조리에 혁신의 새 바람을 일으켰다. 수필집 <하늘 잠자리>를 비롯, <손광성의 수필 쓰기> 및 <한국 명수필 88선>등 십여 권의 저서가 있다.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뉴욕 브로드웨이 갤러리 32에서 허연회 회원들과 워크숍을 가졌다.


갤러리와 전시관을 아우른 반화재는 무척 고담하면서도 정갈하게 가꿔져 있었다. 예의 금붕어 그림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지만, 전체적으로 블루 톤인 실내에 민트 블루로 색칠된 의자 하나가 꾀꼬리 소리만큼 느낌 해맑게 다가섰다. 읽고 싶은 책들이 꽂힌 서가는 물론, 반닫이 위에 진설하듯 올린 대봉 홍시까지 품격을 갖춘 물빛 공간. 많은 걸 내려놓고 사는 이젠, 세사 그 무엇도 부러운 게 없다고 여겼는데 문득 이는 흠선(欽羨)의 념(念). 창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와 묵향 스민 공기까지 내심 탐났다. 현관에 시립한 약장은 서랍 문고리마다 주사처럼 붉은 칠 섬세했으며 측면은 종이함 문양 닮은, 명암 각기 다른 그레이 블루 침착했다. 꼬리 활짝 편 새하얀 공작 그림이 맞아주는 갤러리. 아련해서 왠지 몽환적인 푸른 그림들은 바다와 하늘의 경계 아득한 그리움이었다. 대학에서 조각을 했다는 셋째 따님의 석조 작품은 웨이브 진 표정 부드러웠다.


전시실에 진열된 소장품 중, 자그마한 여치 집부터 남포 생황 벼루 연적 등에서 선생의 성향이 읽혔다. 물소 문진은 내력을 들려주시기 전까지는 그냥 놋쇠 장식품일 따름이었다. 나중에 <물소 문진> 글을 읽고는 심봉사 개안하듯 화들짝 번쩍 정신이 들었다. 색다른 기법이라 낯선, 자유로이 가지 쳐 나가는 상상력에 탄복하며 절로 고개 숙여졌다. 심미적 안목이야 이미 '달팽이'에서 무릎을 쳤지만, 기발한 상상을 이리 재치 있으면서도 품격 있게 풀어낸다는 건 여간한 내공의 힘이 아닐 터. 그쯤에서 다들, 그러니 난작 엎드릴밖에. 한쪽 벽을 빼곡 채운 사진과 책들에 관해서도 일일이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그간 출간된 여러 저서와 표지화를 그려준 제자들의 수필집은 보기에도 훈훈했다. 그 덕에 공백기로 남겨진 2천 년 대 수필계 동향을 대강 가늠할 수 있었다.

 이번엔 정원으로 안내되었다. 하늘은 스카이 블루, 세룰리안블루로 페인팅된 서향원 문을 밀고 안뜰에 들었다. 그럴 수 없이 단아하면서도 아기자기 곰살스러운 정원 어딘가에서 상서로운 향이 퍼졌다. 서늘하도록 청신한 향기는 아마도 국향이거나 은목서 향이리라. 화하게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정원의 김을 매다가 막 일어선 듯 호미와 목장갑 늦가을 볕에 조을고 있었다. 신선한 송진 내 풍기며 쪼개진 장작 차곡차곡 쌓여 이마저 담채화 될 수도 있다니 어찌 신기하지 않으랴.


저마다 수필 소재였던 돌확과 절구 맷돌 석등 처처의 작은 석조 물 뿐인가. 따님의 작품인 등신대 조각이 살뜰하게 지키고 있는 정원. 현무암 화산석으로 알맞춤 쌓아 올린 돌담 안온하고 서귀포 다이 늘씬한 야자수와 우람한 소철마저도 한국 정원에 짐짓 스며들었다. 북녘 고향을 회억하게 하는 자작나무 흰 줄기 굵어가고, 꽃무릇 군락 이룬 바로 옆 연못가 버드나무에서는 풀피리 소리 들릴 듯. 소금쟁이 고요히 거닐던 그러나 지금은 철 지나 수척해진 수련이며 물옥잠 기다리는 연못 바라보며 수석 같은 바위에 하염없이 앉아있고 싶었다. 적재적소에 쉼자리 마련돼 있었으며 정원 안에 산책길 다듬어 사각대는 송이와 마사토 깔아놓았으니 멀리 나갈 이유도 없을 터다. 별사탕 봉지인 양 사그락거리는 소리 내내 발길 따르니 뒷짐 지고 천천히 몇 바퀴 돌다 보면 작품 한 편 궁굴려질 거 같았다.


제주의 이름난 카페에 가면 포토존이 따로 마련돼 있던데 서향원이야말로 다소곳 손 맞잡고 서면 어디든 훌륭한 포토존. 일현 선생 댁 정원은 들머리에서 마무리까지 오순도순 내외분이 마음으로 설계하고 눈으로 매만져 이뤄낸 작품이었다. 묘목 고를 적부터 세심하게 정성 기울였다는 매실나무, 어느새 아취 풍기는 고매된 청매 홍매야말로 가히 귀물. 가꾼 지 십 년 만에 그늘 짙은 왕벚나무 동백나무에 배롱나무 휘늘어진 가지도 운치로웠다. 어느 한 곳 소홀함이 없었다. 언덕 원만히 조성하고 바닥재 조각까지 귀 맞추니 그 또한 프레임 안에 오롯 남겨진 비구상 전시장이다.


팔순에도 동심처럼 맑디 맑게 오뉘 이듯 지내시는 노부부. 구석구석 두 분 손길 닿지 않은 곳 없었다. 화목 한 그루 디딤돌 하나, 살가이 눈 맞추어 쓰다듬은 자취 역력한 정원. 백두산 기슭에서 태어나 한라산 기슭에서 눈 감는다면 멋지지 않을까, 하셨다지만 미수 갓 지났으니 아직 십 년은 더 정정하시겠다. 왜 아니 그러하랴. 마치 동화 속같이 어여쁜 정원 가꿔, 사철 새 노래하고 꽃 향 스며든 여기서라면 능히 백수는 보장되고도 남겠으므로. 서가에서 눈여겨보았던 책 '호모 루덴스' 그대로 글과 그림 새기며 호심이듯 잔잔한 나날 보내시리라 믿는다.

좋이 서너 시간을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필과 그림과 꽃과 나무에 관한 대화 이어갔던 축복 충만한 하루. 해 기웃해서야 일현 선생의 사인과 낙관이 찍힌 네 권의 서적 받잡아 안고서 흐뭇하게 돌아왔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내내 <하늘 잠자리><꽃, 그 은밀한 세계> 및 <선광성의 수필 쓰기>를 비롯, 미수 기념문집인 <손 광성, 그의 문학세계> 란 묵직한 책을 읽어나갔다. 보통 그날 탐방기는 그날로 글을 쓰는데 이번만은 책 읽기가 우선이라서 완독한 다음에야 쓰기 시작했다. 덕분에 모처럼 찬찬하게 독서를 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일현 선생의 수필은 평론가들마저 헌사 일색일 정도로 현 한국 수필계에서는 숱한 글이 텍스트로 선정되곤 한다. 그만큼 일현 선생은 독보적 존재다. 어느 한 작품을 특별히 대표작이라 꼽기 저어 될 정도로 고루 문학성 높고 격조 있는 수필만을 발표하신 일현 선생. 개인적으로는 부연 한옥집에 살며 기왓장 교체하러 지붕 위에 올랐던 대구에서의 삼십 대가 겹쳐져 <지붕을 고치며>를 반복해 읽었다. <개밥바라기> <흰 죽> <나의 귀여운 도둑><누님의 마지막 말씀><감자 타령> 등은 교본으로 삼을 작정이다. 매번 중언부언 사설 늘어놓으며 채우는 긴 글, 원고지 여남은 장을 깡똥하게 줄여나가는 훈련부터 되쌓아야겠다. 일현 선생의 수필 중에서 몇 번 거듭 읽어 외우다시피 한 글이 있다. 수필 '제주 오름'이다. 정녕 신세계였다. 지난 말복, 정수리부터 들이붓듯 쏟아지는 폭포수 맞던 경이로움이었다. <제주 오름>은 행만 바꿔주면 그대로 운율 춤추는 시요, 이어서 연으로 써봐도 경외스러운 산문시다. 수필 '제주 오름' 전문으로 이 글 마무리한다.


제주도를 못 잊는 것은, 못 잊어 노상 마음이 달려가 서성이는 것은, 유채꽃이 환해서도 아니고, 천 일을 붉게 피는 유도화가 고와서도 아니고, 모가지째 툭 툭지는 동백꽃이 낭자해서도 아니다.

어느 아득한 전생에서인가 나를 버리고 야반도주한 여자가, 차마 울며 잡지 못해서 놓쳐 버리고 만 여자가, 삼태성을 지나 북두칠성을 돌고, 은하수 가에서 자잘한 별 무리들 자분자분 잠재운 가슴으로 어느 봄날 문득, 할인 마트나 주말여행을 다녀온 여인처럼, 아무 일 없다는 표정으로 나타나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 언저리 어디쯤 얼굴 묻고 누우면, 누워서 한나절이나 반나절이나 칭얼거리다가, 모슬포 앞바다 자갈밭을 핥는 파도로 칭얼거리다가 지쳐서 잠이 들 때쯤이면 청동 거울처럼 반질한 내 해묵은 불면증도 곤히 잠들지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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