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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4. 2024

무엇을 택할까

독서


근자에 총선이 치러졌다. 유권자  67%가 투표에 참여했다. 선거 전부터 감지됐던 기류대로 과반을 확보한 청색당의  압승, 홍색당은 완패를 당했다. 한쪽으로 심히 기운  결과치로 보나따나 앞으로의 국정운영 난항은 이미 예고된 셈. 대한민국 이래저래 꽤나 시끄럽게 생겼다.


그런가 하면 지구촌에서는 전쟁의 포화가 여기저기서 툭툭 불거지고 있다. 이태째 계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하마스와의 전투도 모자라 이란과도 서로 미사일을 쏘아대는 중이다. 자칫 확전 되면 중동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상황이라 긴장을 고조시킨다. 만일의 경우,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막강한 경제적 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이란이라서다.


골머리 아픈 국제정세나 한국 정치판 뒤로 하고 책이나 읽기로 했다. 이틀 연달아 도서관에 갔다. 거기서 고른 책은 우연히도 서로 상치되는, 아니 명암이 확연히 다른 내용의 책 두 권이었다. 한 권은 장 지글러의 탐욕의 시대, 다른 한 권은 매트 리들리의 이성적 낙관주의자다.

처음에 만난 탐욕의 시대는 읽는 내내 심사를 무척이나 불편하고 찝찝하게 만들었다. 강박적으로 옥죄 드는 논조도 내심 부담스러웠다. 급히 다그치는 바람에 실은 피해자이면서 괜히 가해자나 된 듯 일종의 연대책임감마저 느꼈다. 사회운동가의 선동적인 구호에 밀려 자기도 모르게 쇄뇌되듯 얼떨결에 급진 조류에 휩쓸리 듯.

다행히 곧 이어서 읽은 이성적 낙관주의자로 씁쓸하고도 암울한 그 기분을 다소 상쇄시킬 수가 있었다. 동시에 그간 내가 어리석게도 그럴듯하게 포장된 또 다른 이익집단의 농간에 조종당하며 살았구나 싶기도 했다. 세상 모든 것을 긍정 아닌 부정적 측면만 부각시키며 세기말이 곧 닥칠 듯 위기감을 조성했던 세력들. 지나고 보니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에 본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 그 당시 민중의 삶은 얼마나 비참하던가.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오늘날의 민초들은 그와 비할 바 없이 향상된 질의 삶을 산다. 아프리카 및 동아시아권의 몇몇 국가는 아직도 절대가난을 면치 못하듯, 세계의 모든 인류가 다 잘 사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전보다는 다들 진일보한 생활을 한다. 적어도 현대의 우리는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 못잖은 호사를 누리며 살고 있지 않은가. 변덕스럽게 더러는 '옛날이 좋았어."라고도 하나 50년대의 궁핍과 피폐함을 아는 나는 물질문명이 크게 발전된 오늘날의 생활을 더 좋아한다. 가끔씩 물 맑고 공기 좋던 그 시절을 아름다이 회고하기도 하지만 복귀하라면 나는 절대 사양할 것이다.

 

<탐욕의 시대>는 인간이 누구나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음을 천명하는 책이다. 그럼에도 다수에게 전혀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는데서 이 책은 출발한다.

"이 세상은 온통 불의와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징벌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들이 작성한 선언서에는, 그 같은 선언이 제대로 지켜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법적, 군사적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프랭클린은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그건 잘못 생각한 겁니다. 우리의 선언서 뒤에는 막강하고 영원한 권력이 버티고 있습니다. 바로 수치심의 권력(the power of shame)이죠." (본문 9쪽)

탐욕을 미덕인 양 부추기는 미디어의 정교한 술수와 그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더 갖기에만 골몰한 이들. 남의 시선을 주인 삼는 가련한 인간 군상들로 득실대는 시대. 식량이 남아서 썩어나가도 인구의 6분의 1이 굶주리는 조악한 현실이 어이없다. 이 책은 부채가 야기한 기아와 그로 인한 인간의 수치심을 이야기하며, 이를 타개할 방책으로 연대감을 꼽는다. 우린 어쩌면 자본주의의 안온한 타성에 길들여진 노예 아닌 노예로 살아온 건 아닌지? 그저 매달 알량한 몇 푼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았다고 여기며 살았을지 모른다는 자책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영양결핍과 기아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수백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21세기 최대의 비극이다. 기아는 어떤 이유나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부조리와 파렴치의 극한상태이며 나아가 끝없이 되풀이되어온 반인류 범죄이다. 그럼에도  현재 지구상에서는 5초마다 10세 미만의 어린이 한 명이 기아 또는 영양 결핍으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 바로 그 자체이다.

그 책 수치대로라면 지구상에서 대략 6,200만 명, 즉 세계 인구의 1% 정도가 해마다 무슨 이유로건 사망한다. 이 중에서 다수가 기아 또는 영양 결핍으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따라서 기아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의 가장 중요한 사망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기아란 다름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기아로 죽는 사람은 누구든 살해당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살인자의 이름은 저개발국이 짊어진 멍에인 부채다.

이렇듯 구조적 기아와 국가부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파헤치면서 잘못된 체제를 변혁할 것을 요구하는 저자는 UN 식량조사관으로 재직하면서 목도한 제3세계의 처참한 실상을 낱낱이 고발한다.

그와 연관, 직접적 가해자인 다국적 거대기업의 횡포에 대해서 파헤치며 이것이 얼마나 가공스런 폭력인지, 제3 국과 빈곤국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기존의 전쟁 등 다른 나라를 침탈하는 행위로 인해 사망하는 숫자보다 오히려 이 풍요가 넘쳐나는 세월에 기아와 가난 그리고 경제적 이유에 의한 자살 및 살인등으로 목숨을 잃는 숫자가 훨씬 많다고 그는 폭로한다. 즉 전쟁 없는 지금이 오히려 먼 훗날의 역사책에는 재앙의 시대 곧 탐욕의 시대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고 작가는 탄식하며 지식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일찍이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높이려면 욕망을 줄이라 하였다. 소유에 예속되어 버리는 지나친 탐욕, 끝없는 욕망이 문제다.

 

<낙관적 이성주의자>는 우선 목소리가 아주 자신만만하고 단호하면서도 명쾌하다.

리들리의 낙관론은 인류가 혁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역사와 철학, 경제학과 생물학을 넘나들며 인류의 삶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발전했는지 10만 년에 걸친 문명사를 집대성하여 인류의 역사는 '번영의 역사'라는 결론을 내린다.

석기시대부터 앞으로 2100년까지 인류문명과 역사를 꿰뚫는 통찰과 예지로 비관주의를 뒤엎으며, 특유의 저돌성과 자신감으로 낙관주의를 설파한다. 유전과 생명의 영역을 넘어 문명의 미래까지 예리한 필치로 짚어주는 그.

'나는 이성적 낙관주의자다. 이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기질이나 본능 때문이 아니라 증거를 살펴본 결과 낙관주의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펼치는 페이지들에서 독자들 또한 그렇게 만드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본문 26쪽)

 '혹시 당신이 세상은 점점 좋아져 왔다고 말한다면, 순진해 빠졌고 둔감한 사람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세상이 지금까지와 같이 앞으로도 점점 좋아질 거라고 말한다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다. 실제로 경제학자 줄리언 사이먼은 1990년대에 이렇게 말했다가 온갖 비난을 받았다.' (본문 419쪽)

1798년 맬서스 인구론에서 인류의 미래는 이미 비관적으로 예측됐는데 곧 식량위기가 닥칠 것이라 하였다. 그 외에도 빈곤의 증가, 사막 확대, 악성 전염병, 물 전쟁, 석유 고갈, 정자 수 감소, 엷어지는 오존층, 산성비, 광우병, 지구 온난화, 소행성 충돌… 냉철하고 진지한 유명 엘리트들이 이 같은 위협들을 지지했고, 언론과 대중매체는 이를 선전해 왔다. 이처럼 인류의 미래에 관한 현대의 담론을 지배해 온 것은 비관주의적 관점이었다.

1960년대엔 인구 폭발과 세계적 기근이, 1970년대엔 자원고갈이, 1980년대엔 산성비가, 1990년대엔 세계적인 전염병이, 2000년대엔 지구 온난화가 이를 대표했다. 2000년이 시작될 때 매스컴에선 Y2K버그로 인한 대혼란을 예상하며 주의와 준비를 종용했다. 대처의 덕분이겠지만 새천년을 맞이하며 전산망의 대혼란은 기우였음이 판명되었다. 전환점 소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리들리는 현재 다른 모든 문제라고 하는 것들 중에 진짜 나빠지는 것은 교통체증과 비만인데 그럼에도 이 둘은 풍요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비관론 앞에 리들리의 낙관론은 막힘이 없고 거침이 없다. 오늘날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는 비관주의를 폭넓은 역사적 시야와 방대한 근거를 가지고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는 확고하게 앞으로 100년, 인류는 전례 없는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진단한다. 2100년에도 인류는 오늘날에 비해 더 잘 살 것이며, 생태환경도 더 나은 정도로 개선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또한 각종 생태주의, 녹색운동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리들리가 ‘그린’ ‘청정’ ‘재생가능’ ‘지속가능성’ 등의 개념을 비판하는 근거는 과학과 경제학, 그리고 인도주의다. 같은 맥락으로 과학적 검증을 거친 유전자조작에 대한 반발을 우려스러워하며 유기농 운동 역시 오류에 빠져있음을 지적한다. 모든 합성비료를 회피하는 행태도 불합리하다고 지적한다. 최근에 관심의 대상인 유기농법에 대해 리들리는 집약농업에 의한 집약생산만이 90억 명의 인류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위협으로 대두되고 있는 ‘기후 변화’ 문제도 마찬가지다. 급속하고 심각한 기후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 인류가 기후 변화에 전혀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보다, 온난화를 선택함으로써 성장을 만들고 혁신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지구촌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던 비관하던 그것은 각자의 자유의지이겠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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