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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4. 2024

앨버트로스는 다시 비상한다, 이제하 시인


세상에서 가장 날개가 큰 새 앨버트로스. 땅에서는 어딘가 어설프고 굼뜨나 가장 높이 날고 가장 멀리 날 수 있는 새이다. 그 앨버트로스가 다시금 비상을 위해 오조리 바닷가에서 상승기류를 기다리고 있다.


성산 오조 지오 트레일을 걷거나, 올레 2코스를 지나거나, 일출봉 오른 후 식산봉을 찾거나, 황근을 보러 가거나, 철새 도래지를 들리다가, 길목이라 한 번은 기웃거렸을 작은 돌집.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어류를 가두었다가 기를 수 있도록 쌓은 돌담 특이한 양어장인 '장정의 보'와 바로 붙어있다.


오조 마을 들머리이자 성산 일출봉이 마주 보이는 오조리 내수면 둑방에 위치한 Z 갤러리. 내수면 바다 한가운데 물 위에 떠있는 집, 주변 풍광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자리다. 이제하시인과 갤러리에서 오후 1시 인터뷰를 가졌다. 실내는 전시실이나 카페, 사무실에서도 차용되고 있는 신개념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그렇다고 신박하다는 게 아니라 감각 개성적인, 요즘 확산되고 있는 이른바 창고형 아틀리에였다.  



액자 그림이 걸린 벽 한쪽에 기타 두 대가 기대서 있었다. 창을 열고 드리운 발을 걷어올리자 해풍이 드나들었고 일출봉이 담싹 안겼다. 천장 각목과 합판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벽면 마감 처리를 거칠게 한, 정돈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시인을 닮았다.


트레이드 마크가 된 벙거지에 헐렁한 차림으로 짐 부려놓듯이 앉아, 무상심하게 성산포로 내려오게 된 내력을 들려줬다. 오래전에 안면 튼 지인 하나가 갤러리 공간을 제공하겠다 하자, 앞뒤 생각 없이 단지 바다가 좋아서 온 제주였다. 막상 당도해 보니 여건이 녹록지 않은 데다 뜻밖의 암초까지 만나 심신만 피폐해졌다. 당시 겪었던 모멸감은 틀림없이, 오랜 시간 견디면서 뼛속까지 스며들어 녹여낸 글로 환치되어 씁쓸한 상흔 치유시키리라.


그렇게 가까스로 상처 추스르고 새 택지를 물색하다 어렵사리 인연 닿은 장소가 여기라고 했다. 태풍이 훑고 가 만신창이 되다시피 한 건물 안팎으로 다니며 보수 공사에 들어갔다. 힘든 줄도 모르고 먼지투성이가 되어 갤러리를 다듬어서 간판도 달았다. 오픈에 맞추어 첫 전시회를 준비했는데 하필이면 뒤편 철새 도래지에 조류독감이 번지며 무산되고 말았다.


새 희망으로 맞이한 2020년 이른 봄, 코로나19가 확산되며 온 지구촌에 미증유의 재난이 덮쳤다. 잠시 번지다 그칠 줄 알았던 역병은 속수무책으로 퍼져 기어코 세상 모든 시스템을 멈추게 했다. 내수면 물길만 하루 두 번 틀림없이 들고 날뿐, 갤러리는 개점휴업 상태로 하릴없이 기다릴 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3년 세월, 그 사이 시인은 두 차례 큰 수술까지 받았다. 모두가 힘들게 견딘 시간이었지만 병마마저 덮치자 더더욱 곤고할밖에. 갤러리 조금 지나면 모란동백이라는 책방이 나온다. 모란 동백? 어디선가... 언젠가... 설핏 들어본 듯하리라. 대뜸 멜로디가 떠오를 만큼 아마도 대개 귀에 설지는 않을 터다. 원제목은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다. 존경하는 시인 김영랑과 작곡가 조두남을 향한 오마주를 담았다는 모란 동백. 그러나 가사 음미해 볼수록 허망스러운 인생사 누구나 그러하듯, 더구나 스스로의 미래를 예견이나 한 듯해 처연스럽기만.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모란 동백, 그가 1998년 작사를 했고 작곡도 해서 직접 부른 노래다. 글만 써서는 도저히 밥벌이가 안되는지라 대학로에서 카페를 열었다. 십수 년을 운영한 카페 마리안느, 소설가 시인들의 아지트였던 여기서 기타를 들고 무대에도 섰다.  


홍대 미대를 다니면서 초현실주의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그. 잠재의식과 무의식에 호소하는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그렇게 구축하였다. 통념이나 선입감을 배제하고 글을 그림처럼 쓰고 싶었던 그는 무의식 세계에 자연히 경도되었다.  


그는 회화적인 문체와 시적인 상징 수법을 구사해 노랫말을 짓고 곡을 쓰는 싱어송라이터였다. 음유시인인 그는 소설가이며 음악가이자 화가로 뭇 예술의 장르를 넘나드는 명실상부한 멀티플레이어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多才多病', 재주가 많으면 사는데 어려움도 많이 따른다고 하였다. 아웃사이더 혹은 마이너리티로 내몰리기 십상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실제로도 보헤미안적 기질로 살아온 이력. 정주하지 못하고 전국 각처를 유목민 되어 구름처럼 흘러 다닌 세월이 길었다. 하여 긴 그림자 이끌고 변방의 빈 들을 떠도는 외로운 영혼일 수밖에 없었는가.


나이보다 항상 정정해 오래도록 청년이라 불렸다는데 그 패기와 결기 어쩌다 꺾였을까. 1974년 채식주의를 테마로 한 <초식>으로 현대문학상이 주어졌을 때 그는 이를 거부하므로 문단에 충격파를 던졌다. 과열된 문협 선거에 얽힌 문단 정치에 혐오감을 느꼈다는 게 수상 거부 이유였다. 작년엔 심장 수술, 근자에도 척추 수술로 몇 달을 누워 지냈다는 노구를 지팡이에 의지한 시인은 구부정한 데다 헙수룩하기까지 했다.  


약관의 나이에 <신태양>, <현대문학>, <한국일보> 등을 통해 시와 소설로 등단해 거침없이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그다. 하긴 이미 중학 3학년 때 <학원>사에서 주관한 제1회 학원 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시인이다. 당시의 시는 60년대까지 중 3 국어 교과서에 실렸었다.


1964년 박재삼, 성찬경, 박희진 등과 함께 동인으로 시작 활동을 해왔으나 시만 써서 생활이 안 되자 소설 쪽으로 옮겨 갔다. 저서로는 소설집 <초식> <기차, 기선, 바다, 하늘> <독충>과 장편소설 <열망> <소녀 유자> <진눈깨비 결혼><능라도에서 생긴 일> 등. 시집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빈 들판> 및 영화 칼럼집을 비롯, CD <이제하 노래 모음> 등이 있다.


1937년 경남 밀양 출신으로 1956년 동화 <수정구슬>과 시 한 편이 새벗이란 소년 잡지에 동시 당선되었다. 그 후 이십 대 초인 1959년 현대문학에 시 추천, 같은 해 신태양에 단편소설 <황색의 개>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이장호 감독이 영화화하기로 하자 시나리오 작업과 영화 주제가를 손수 작곡했다. 그는 여러 권의 소설집 시집 외에 동화집 콩트집 일러스트집을 펴냈는가 하면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하는 전방위 예술가다. 타고난 남다른 재능 비범한 그는 가뭄 타지 않는 용천수처럼 끊임없이 문학 외에도 다방면으로 활동을 이어왔던 것.



시인으로 출발한 그는 소설로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리문학상, 한국일보 문학상 등 수상 경력 역시 화려하다. 1982년 첫 전시회를 필두로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가졌으며 Z 갤러리에서도 작품전을 열었다. 위키 백과를 훑어보다가 자녀난에 적혀있는 윤이형이란 낯선 이름 앞에 시선이 멈췄다. 반짝, 호기심이 일만치 의아해졌다. 이 시인의 자제라면 이 씨 성이 당연한데 윤이라니?


대개의 부모 세대가 그러하듯 자녀에 대한 화제가 자연스러이 오른 건, 궁금한 건 못 참는 이 성격도 일조한 셈. 1976년 생으로 이제하 씨의 딸인 그녀 본명은 이슬, 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마친 그녀는 2005년 지하란 필명으로 등단을 한 소설가였다. 지하, 그래도 내 이름에서 '하' 자는 가져갔다며 빙긋 웃는 아버지는 외동딸에게 비파 슬 자를 넣어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했다.


단편 <검은 불가사리>로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당선자가 된 딸을 시상식장에서 몇 년 만에 만나게 된 아버지. 대학 때 시를 썼다는데 소설로 신인문학상을 받자 깜짝 놀란 아버지는 축하해 주고자 시상식에 참석했고 딸은 "아버지 오셨네요"가 전부였다. 팔판동 살 적에 한밤중 행길에서 딸아이와 함께 장난감 비행기를 날리며 놀았던 기억 아이는 깡그리 잊혔을까. 살아보니 하긴, 참아내기 힘들었던 한 기간은 통째로 편집돼 머릿속에서 하얗게 사라져 버린다. 수상 소감에 "어머니께 좋은 글을 보여드리고 싶었다"라고 썼다는 그녀 속내 어떠한지 물론 저간의 사연은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중앙일보에 응모할 당시에도 여덟 편의 수준 고른 소설을 내놨다는 그녀는 2007년부터 2020년까지 소설집 여덟 권을 출간했다. 그 외 여러 권의 공저를 냈으며 번역서와 영문소설을 펴냈다니 대단히 왕성한 활동상이다. 아버지의 틀에서 벗어나려 안간힘 쓰면 쓸수록 아버지 그늘을 비껴갈 수 없는 일종의 태생적 한계랄까. 부전여전, 소설에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는 것까지 한 치 오차 없는 정확한 DNA가 소름 돋을 정도다. 딸은 젊은 작가상, 문지문학상 수상에 이어 아버지처럼 이상문학상 대상을 2019년에 받았다.


그녀는 아예 필명을 윤이형으로 바꿔 지금은 번역에 치중하고 있다는데 아버지는 딸이 무한 대견스러우리라. 자녀는 부모의 DNA를 절반씩 지닌 존재이나, 단순 유전자 카피본 이전 이 시인에게는 오직 한 점 이 세상에 남긴 살붙이다. 생물학적 피의 당김만은 아무리 아웃사이더로 살아왔다 하여도 어찌할 수가 없는 찌릿함 아닌가. 방관자 같은 허심한 표정으로 대담을 나누던 도중, 이때 시인이 가장 밝은 표정을 지었기에 문득 든 한 생각. 외람되지만 내심, 한강을 키운 한승원 작가의 삶이 괜찮게 여겨지지는 않았을까 싶었다.


국지성 소나기를 예보하더니 창밖 짙푸르던 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오뉴월 날씨만큼이나 예측불허인 인생 여정이긴 하다. 그러나 앨버트로스처럼 저 높은 창공을 누비던 자유로운 영혼 이제하선생께도 아직 남은 시간이 있다. 다시 한번 비상의 나래 높이 그리고 크게 펼치시기를. 폭풍 거세게 칠 때 비로소 절벽 박차고 가장 높이, 가장 멀리까지 눈부신 비상을 할 수 있는 당신은 신천옹이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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