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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파소 노블스 지나며

by 무량화


차창 밖을 내다보니 어째 풍광이 낯설지 않다.

기시감이 들고도 남는 것은, 이 길을 몇 번이나 지나다녔던 끼닭이다.

산 미구엘 미션과 카멜 미션이나 몬트레이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고 봄철 겨자꽃을 보러 왔던 곳이니까.

계절이 마침 우기라서 그때만큼 하늘빛 푸르길 기대할 수야 없지만 암튼 비가 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지금은 겨울철이라 녹슨 철사줄처럼 늘어선 길가 포도밭, 구릉지대에 즐비한 와이너리, 바다 가까울수록 숲길에 고스트 트리가 줄지어 섰었지.

이어서 해안도로로 들어서면 탁 트인 바다를 옆에 끼고 달리면서 아름다운 태평양에 취할 것이며 곧이어 거대한 화강암 바위가 기다리는 모로베이에 이르게 되겠지.

즉흥적으로 도중에 생각잖았던 다른 명소들까지 섭렵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긴 했지만.

이번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싱싱한 굴요리로 명성 높은 모로베이다.

과거에는 근처 목장지대에서 키운 소를 실어 나르는 항구였으나, 현재는 굴 양식업으로 활기가 넘치는 어항이라 비릿한 갯내음을 풍긴다.

해조류 풍부해 해달 서식처이기도 하며 바다코끼리가 방파제에 올라 한가로이 볕바라기를 하는 모로베이다.


태평양 연안의 대도시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중간쯤에 있는

샌 루이스 오비스포 카운티(San Luis Obispo County)에는 여러 볼거리가 산재해 있다.

센트럴 코스트(Central Coast)를 장식하는 보석같이 눈부신 바다는 바다대로 매혹적이고,

내륙에 들어서면 역사 향기 스민 고풍스런 미션과 저마다 특색 있게 꾸며진 와이너리가 잇따라 반겨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서 깊은 목장 지대, 낭만 어린 해안 도로, 미네랄 온천장, 아웃도어 레포츠도 즐길 수 있다.

이름도 아기자기한 마을 캠브리아, 하모니 그리고 파소 노블스 외딴 시골 숲길을 지나다 보면

눈길 사로잡는 특이한 풍치들이 기어코 발걸음 멈추게 만든다.

절로 고생대 바다 생물을 떠올리게 하는 캠브리아,

왠지 Noblesse Oblige란 단어가 겹쳐지며 귀족적인 느낌이 드는 파소 노블스,

어쩐지 동네 사람들 표정마다 미소가 어렸을 것 같은 하모니란 마을은 언제건 꼭 들러보고 싶던 터였다.

햇빛 찬란히 쏟아지는 남프랑스의 전원 풍경을 연상케 하는 평화로움이 깃든 작은 마을들,

떡갈나무 길이라는 이름대로 파소 노블스 여기서라면 누구라도 인상파 화가가 될 것만 같다.

아래는 벌써 십 년 전 봄날 사진들이다.



둥그스름 완만한 구릉과 양지바른 계곡 품에 안긴 2백여 개의 와이너리들.

이 지역에서 프란치스코 회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와인을 제조한 시기는 1797년,

그렇듯 수 세기 전부터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들어 온 전통 깊은 지역이다.

더욱이 비옥한 석회질 토양과 적절한 강우량에 풍부한 일조량 등 이상적인 환경 덕에

센트럴 코스트는 이제 최고 품질의 와인 산지로 자리매김되었다.

파소 노블스 지역은 프랑스 론 지방의 토양과 기후조건이 비슷해 론 지방의 고유 품종 포도인 쉬라(Syrah), 무흐베드르(Mourvedre), 그르나슈(Grenache)를 선택했다고 한다.

널리 알려진 나파(Napa)나 소노마(Sonoma)처럼 빈티지한 고품격의 멋 대신

아직은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정취 풍기기에 오히려 상업화 냄새 덜해서 한결 정스러웠다.

순후한 풍경 속에 쏘옥 안기듯 조촐하니 소박한, 또는 중세 장원 본뜬 근사한 와이너리 순례하며

맛 제대로 모르며 폼만 잡는 와인 시음장일랑 얼핏 스쳐버리고 이것저것 소소히 주워 담은 컷들.

꺼내놓고 보니 그 시간들 꽤나 차졌구나, 새삼 흐뭇한 기쁨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길 접어들어 잠시 발길 멈추고 여유작작 즐겨볼 수 있음도 여행이 주는 묘미 중 하나다.

뒷짐 지고 느린 걸음으로 아주 한갓지게 산촌 향기 음미하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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