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짝이다.
간다 간다 하면서 애 셋 낳는다는 속담대로 말이다.
곧 철수할 것처럼 매양 엉거주춤한 채로 이민생활을 한 지 어언 석삼년이 넘는 세월.
야전부대 임시막사 같은 아파트살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뜨내기 살림이라 가구 역시 변변찮다.
그 형색에 어울리지 않게 꽤 그럴듯한 호두나무 책장 하나가 내게 있다.
친구가 콜로라도로 이사를 떠나며 주고 간 것으로 중간 뚜껑을 열면 책상이 되는 다용도 기능장이다.
귀퉁이가 약간 이지러지고 더러는 긁혔지만 흐르는 물결무늬 선연한 목리가 우선 아름답다.
암갈색 중후한 분위기에서는 앤티크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묵직한 색조도 맘에 들지만 단순하면서도 점잖은 외관이 기호와도 맞아떨어진다.
별로 크지 않은 규모라 있는 듯 없는 듯 무덤덤하니 튀지 않아서 또한 좋다.
호두나무 목재는 내구성이 뛰어난 단단한 재질에다
광택 은은해 예전부터 고급 가구, 장식용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책장과 인연이 닿은 지도 그럭저럭 제법 됐다.
낯익어 스스럼이 없어지자 더러 책장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호두나무가 있는 내 유년의 추억들이 화제의 주대상이다.
매방리 할아버지 댁에 있던 두 그루의 우람스러운 호두나무,
집 앞 우물가와 바깥마당 잿간 옆에서 짙푸른 잎새 너르게 드리운 채 한여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던 그 나무.
가을이 깊어지면 알이 실한 호두를 섬으로 거두기도 하였으니 가용에 적잖이 보탬 돼주었을 터.
창천에 그려진 추상화 같은 열매, 돌배처럼 야문 점점의 호두를 장대로 따내린 뒤 수북이 쌓아두고 썩힌 다음 육질의 겉살을 제거하고 나야 그제사 호두는 제 모습 드러냈다.
호두 알을 섬돌에 올려놓고 돌멩이로 깨뜨리면 드러나던 보얀 속살의 고소한 맛까지 이끌어내 주는 호두나무 책장.
요새는 기분 울적하니 침체된 날이라도 책장을 마주하다 보면 입귀가 살푼 위로 향해지곤 한다.
지난겨울의 유쾌한 시간들로 인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딸이 있는 캘리에 갔다.
그때 무엇보다 반가운 선물은 휴가차 잠시 들른 엄마를 위해 딸이 예매해 놓은 발레 티켓.
겨울이면 으레 등장하는 시즌 문화상품이자 성탄 단골 레퍼토리의 하나인 <호두까기 인형>을 그렇게 보게 되었다.
장소는 클라멘토에 있는 아담한 칼리지 내의 공연장이었다.
LA 시내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기에 초행길이기도 하여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인디언 캐년이란 지역안내 팻말을 지날 무렵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높다란 산과 산 사이 분지로 이루어진 아늑한 마을은 숲 깊고 의외로 가로수가 소담스러웠다.
대학가는 고풍스럽기도 한 데다 차분하니 학구적인 환경이라 절로 공부에 전념하게 될 것 같은 동네였다.
다들 면학에 힘쓰느라 나돌아 다니지도 않는지 타운 전체가 한적하기만 했다.
거리엔 가로등도 드문드문, 어둠침침한 데다 길가 어디도 흔해빠진 햄버거집 하나 없었다.
깜깜밤중 어둠 속 미로 같은 길을 한참 헤매다 공연장 앞에 서니 근 일곱 시, 겨울철이라 밤이 금세 덮쳤다.
서둘러 지정석을 찾아 자리 잡은 다음 안경을 찾아 끼고는 카탈로그를 펼쳐 들었다.
헌데 이 무슨 변고인고?
응당 날아갈 듯 우아하니 눈부신 발레리나를 염두에 두었더랬는데.
세련되지 못한 안목이라 민망스러운 타이즈 차림의 발레리노에 촌티 내지 않을 훈련도 나름 하고 왔는데.
어럽쇼?
안내장 표지에 목각 병정이나 생쥐 인형은커녕 엉뚱스레 웬 새빨간 가죽옷차림의 요상한 가이 하나가 춤을 추고 있질 않은가.
호두까기 인형이란 글씨 위엔 nutty란 낯선 단어가 건들건들 춤을 추고도 있었다.
요게 뭔 말이고?
번역을 청하니 미국식 속어로 좋게는 '멋진' 그러나 대체로는 '미친' 내지 '요상하다' 뜻으로 이해하란다.
그렇게 만난 불량스럽고도 사랑스러운 호두까기 인형에 홀딱 빠져 공연 내내 얼마나 박장대소를 해댔는지.
그처럼 작품에 완전 몰입되기도 흔치 않은 일인데 무대와 혼연일체 되어 어찌나 신나고 흥겹게 즐겼던지.
시쳇말로 뿅~간 채 오블라디 오블라다, 흘러 흘러가는 인생은 즐거이 잘 흘러갈 거라고 줄창 손뼉을 쳐댔으니까.
요즘은 오페라도 뮤지컬도 발레도 퓨전 버전이 대세다.
기본 내용을 주축으로 하여 연극적 요소도 가미하고 거기에 재즈 살사 탭 힙합댄스뿐인가.
비보이의 브레이크 댄스에다 아크로바틱 쿵후까지 격정적이고도 열정적인 춤과 기예로 꽉 찬 무대는
또 배경이 얼마나 자주 바뀌던지.
동양 소녀들이 추는 차 요정의 춤, 생쥐들의 춤도 재롱스러웠으며 표정으로 말하는 왕자님은 근사한 미남이었다.
재미있기로는 여장남자 발레리노인 클라라, 큰 덩치임에도 잠옷 바람의 그는 퍽 귀여웠다.
호두까기 인형의 풀버전인 고전 발레도 멋지겠지만 어린이 뮤지컬 혹은 코믹 발레로의 변화 시도가 퍽 신선하고도 흥미로웠다
이처럼 계층별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연출가의 상상력에 따라 다양한 영역으로 변화를 확대시키는 연출 시도.
날라리 호두까기 인형으로의 변신이 돋보이는 참신한 공연이었다.
가장 소중한 '금'은 지금이라고 했다.
그래, 지금 이 순간 함빡 미소 지을 수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
행복한 기억의 힘을 철석같이 믿는 나.
내게 허락된 축복의 순간들이 모여 나의 오늘은 건강히 지탱되는 것.
고마워, 날라리 호두까기 인형아!
덕분에 실컷 웃을 수 있었고 그 생각만으로도 지금 기분이 좋단다.
왕자님도 꼬마 생쥐도 요정도 다들 고마웠어.
무대를 준비한 모든 분, 볼거리 즐길 거리를 충분히 제공하여 관객을 만족시키는 최선의 봉사를 아끼지 않았더랬지.
역시 감사한 일이고 그 자리를 마련해 준 딸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늦은 시각 겨우 찾아낸 그리스식당에서 처음 맛본 돌마데스도 맛 각별했고.
그리고 아직도 유효한 행복감을 더불어 나눌 수 있는 호두나무 책장에게도 감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