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실 존자암, 설경 방문

by 무량화


일요일, 해가 떠오르자 한라산 자태 눈부셨다.

눈 하얗게 쌓인 백록 봉우리가 어서 오라고 눈짓을 했다.

설렘으로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아침 미사에 참예하고 부리나케 아점을 때운 뒤 영실로 달려갔다.

오전 예배시간이 지난 터라 황선생도 영실행에 합류했다.

시간 관계상 윗세오름은 무리였다.

처음 방문이긴 하지만 존자암이라면 설경 방문지로는 오히려 최적이겠다 싶었다.

초대받은 설경으로 향하면서 아차!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스틱도 아이젠도 준비를 하지 못했다.

다행히 적설량 적당하고 빙판길은 아니라서 어려움은 없었다.



하늘 더없이 청명하고 바람결 온화해 장갑을 끼지 않아도 괜찮은 날씨였다.

사진 찍으려면 성가시게 거치적거리는 장갑이다.

둥둥 감았던 머플러도 풀어 제켰다.

원래 눈 쌓인 다음날은 하늘빛 청유리알처럼 싸늘하게 보여 무척 쌩할 것 같아도 푹한 편이다.

오르막 언덕 따라 이어지는 계단길은 눈이 쌓여 걷기 수월했다.

숲에 어리인 청량감에 심호흡 절로 되고 신명이 올라 노래 흥얼거려졌다.

이 청쾌함을 누릴 수 있는 축복 주심에, 어찌 하늘 우러른 감사에 감사가 아니 나오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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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엽수 외에는 거진 다 낙엽 져 가지만 앙상한 나목의 숲에서 까마귀 까각거렸다.

워낙 날씨 맑은 날이라 그마저 음산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더구나 존자암 오르는 내내, 눈 구경 온 가족 단위의 산행인이 이어져 다사로운 분위기였다.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며 재잘거리는 아이들 해맑은 소리도 듣기 좋았다.

제주조릿대가 길섶에 무성해 바람 불때마다 잎새끼리 스치며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까지 정겨웠다.

눈길 뽀드득거리는 발자국 소리, 바람 소리 사이로 물자 운송하는 모노레일이 옆지기처럼 따라왔다.

몇 번의 오르내림이 계속되더니 마침내 저만치 길 가운데 일주문이 서있었다.

존자암에 다 왔나 보다.



어딘가 허술해 뵈는 건물이 앞장서 마중을 나왔다.

뜰에 약수터가 있기에 내심 법당인가 싶기도 했다.

아무런 현판이 없으니 무슨 건물인가 의아해했는데 종무소였다.

우측 종각은 설명이 없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만 단청 입힌 기와집이라서 뭐야? 싶었다.

입구에서 사찰 건물 배치도를 옳게 챙기지 않은 내 불찰이다.

종무소를 돌아 뒤로 가자 그럼 그렇지, 4단 축대 위에 둥드렷 날아갈 듯 팔작지붕 치켜올린 대웅보전이 정좌했다.

통상 그 뒤로 규모 조촐한 삼성각이나 독성각이 자리 잡는데 이곳은 명칭도 특이한 국성재(國聖齋)가 무게감 있게 서있다.

국성재는 매년 첫여름달(4월)에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재를 봉행하던 제각이다.

제주목·정의현·대정현3읍의 현감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목욕재계하고 암자에서 제사를 지내니 이를 국성재(國聖齋)라 하였다고.

그보다 더 상층인 언덕 위에 부도탑 한 기가 모셔져 있었다.



제주의 중심축인 한라산, 한라산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장소로 여기는 백록담과 더불어 영실은 이름 자체부터 영험스런 기운이 서렸다.

해서 제주민들은 한라산 전체를 기도처이자 부처님 도량으로 여겨 이곳에 불국정토 이루기를 기원했다.

부처님께서 오신다는 뜻의 불래(佛來), 그리 믿었기에 봉긋한 오름 이름을 불래오름이라 짓고 그 자리에 존자암을 건립했다.

그리하여 존자암은 1,362m 불래오름 남사면의 밋밋한 능선 마루에 정좌해 있다.

대웅보전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 좌측에는 이곳에 불교를 전했다는 발타라 존자, 우측에는 산신을 봉안했다.

존자암은 부처님의 16아라한 중 발타라 존자가 초전법륜한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현재 존자암지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존자암지 세존사리탑은 고려 말 혹은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내 유일의 부도이다.

부도란 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묘탑이다.

총 높이 181㎞에 팔정도를 상징하는 8각형 기단 위에 둥근 굄돌을 놓고 탑신을 얹은 후 옥개석과 보주를 올린 모습이다.

이 부도는 제주석으로 만들어진 석종 모형의 사리탑으로 유려한 곡선미를 지녀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고.

존자암 절터에서 가장 상부에 속하는 언덕 위 부도탑에 올랐다가 살푼 언 돌층계가 조심스러워 주춤거렸다.

앞선 청년 하나가 주르르 미끄럼을 타고 언덕을 내려가길래 따라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여러 사람이 발자국 디뎌 다져진 길보다는 눈 쌓인 곳이 안전해, 길가 눈속으로만 헤집고 걸어 하산했다.

그 통에 등산화 속으로 눈이 들어와 양말은 푹신 젖었지만 20여 분 만에 무탈히 영실 버스정거장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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