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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판악 코스로 사라오름을

by 무량화


옆집 현주 씨가 한라산 탐방로 성판악 코스로 두 사람을 예약해 뒀다.


예약 입산 시간은 10시에서 12시까지였다.


성판악 입구 휴게소 철거로 산행에 필요한 물품 등은 사전에 준비하라는 유의사항이 예약번호에 딸려왔다.


적당히 엷은 구름이 깔린 하늘이라 태양은 바다에서 불끈 솟아올랐으며 날씨 화창하고 바람 잔잔했다.


산행에 나서기 아주 좋은 기상조건이었다.


틀림없이 매듭달 주말을 근사하게 장식해 줄 특별한 풍경이 기다려 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거처에서 35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라 아홉 시경 281번 버스를 탔다.


어제도 조천에 가느라 이 버스 타고 동 시간대에 516 도로를 넘었으니 연 이틀 같은 코스를 행보하는 셈이다.


열 시 못 미쳐 성판악에 도착했다.


곧장 산행 출입구로 가서 앱에 깔린 등산로 입장 QR코드를 확인받은 다음 아이젠과 스틱 체크를 필했다.


잠시 후, 입구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이젠 준비를 하지 않은 젊은이 둘은 가벼이 산행하려고 왔을 뿐이라며 초입만 들어갔다 나오겠노라 했다.


하지만 아이젠 착용을 하지 않은 채로는 입장 불가라고 못 박자 서울에서 예약을 하고 일부러 비행기 타고 왔다며 사정을 했다.


휴게소 매장도 철거한 상태, 반 시간 정도 운전해 시내로 가서 아이젠을 사가지고 오라며 끝내 허락지 않자 그들은 벌컥 화를 냈다.


아이젠을 준비하라는 별도 지시도 없이 일방적 횡포를 부리냐며 따지고 들었다.


예약자에게 발송한 웹 발신 내용에 '겨울 산행에 필요한 물품을 사전 준비하라'는 말에는 모든 게 다 포함된 거라며 되받아쳤다.


겨울 산행 시 아이젠은 절대 필수품, 그들은 하는 수없이 툴툴거리며 뒤돌아섰다.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는데 웬걸, 산으로 한 발짝 들여놓자마자 아이젠 없이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들 입장을 대충 봐줄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산길은 심할 정도로 완벽한 빙판길이었다.


수많은 등산객들의 발자국으로 눈길이 다져진 데다 영하의 밤이 되면 길은 고스란히 얼어붙고 말 터다.


그 위로 거듭거듭 눈 내려 쌓이면 길바닥은 자동으로 빙판이 되게 마련이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입산자들의 장비를 철저히 감독하는 것만이 만일의 사고를 줄이는 방편이겠구나.


겨울 산행 필수품을 갖추지 않은 등산객에게 출입을 단호하게 통제하던 일이 비로소 이해됐다.



안전장비를 잘 갖춘 덕에 우리는 안심하고 느긋하게 눈길을 걸어 나갔다.


우리는 올라가는 데 어디까지 산행을 했는지 벌써 하산하는 팀들이 내려들 왔다.


성판악 탐방안내소에서 한 시간 반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속밭 대피소까지 근 두 시간이 걸렸다.

목적지가 백록담 정상도 아니고 그 3분지 2쯤인 사라오름을 다녀올 예정이라 급할 게 전혀 없었다.


천하태평으로 주유천하할 계제는 아니지만 사방의 눈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느라 자연 발걸음은 지체됐다.


군락 이룬 시누대와 굴거리나무도 찬찬히 살펴보고 참나무 가지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도 고개 젖히고 한참씩 찾아보았다.


훤칠한 삼나무 감싸 안은 채 물오르는 소리도 들어보고 짙푸른 주목 이파리 비벼서 향도 느껴보았다.


그렇게 놀멍쉬멍 올라가 속밭 대피소에 이르렀다.


바람 한점 없이 고요하고 봄날처럼 온화한 날씨라 겉옷을 벗어 배낭에 넣었다.


대피소 뜰에 빙 둘러 놓인 의자에 앉아 챙겨 온 간식을 먹는데 까마귀들이 발치 가까이까지 몰려들었다.


등산객들이 던져준 먹거리를 먹어 버릇해 아예 진을 치고 기다리는 까마귀 떼.


음울한 소리에다 온통 새카만 빛깔이 거부감을 들게 하는 새인데, 큼다막한 부리를 보자 티베트의 조장(鳥葬) 풍습도 떠올랐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사라오름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 옮겼다.


거기서부터는 가풀막진 경사길이었다.


전에 한번 와본 현주 씨 말에 의하면 길 전체가 계단으로 돼있어 오르기 꽤 버거웠다고.


헌데 눈 깊이 쌓인 덕에 층계 길은 전혀 가늠조차도 안 됐다.


계단을 하나씩 밟지 않으니 어쨌든 걷기는 편했다.


사라오름 입구, 사라오름 전망대 안내판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좌우 숲 사이로 오름들이 울멍줄멍 드러났다.


제주 오름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으며 산정호수가 있다는 사라오름이다.


점점 고도가 높아지면서 오름 봉우리에 백설 하얗게 쌓인 곳도 보였다.


경사길 얼마쯤 오르자 푹 꺼진 널펀펀한 분화구가 드러났다.


접시같이 둥근 분화구에는 물 대신 백설만 고르게 차 있었다.


데크길 휘돌아 다시 언덕길 따라 오르니 전망대가 신세계 펼쳐두고 우릴 기다렸다.


저 아래 일망무제로 탁 트인 서귀포 시가지와 바다 조망권이야말로 압권 중의 압권이었다.


남으로는 낯익은 서귀포 앞바다 문섬과 섶섬과 지귀도가 푸르게 떠올랐다.


서북쪽으로 살짝 한라산 백록담 이마가 보였다.


아아, 멋지다! 너무나도 훌륭하구나! 탄성 연발~~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풍광이었다.


그러나 마냥 도취감에 빠져있을 수 없게 서릿발 같은 냉기가 엄습해 왔다.


설한풍에 해풍이 가세해 냉랭해진 데다 오후 들수록 시리게 파고드는 쌩한 공기.


겉옷을 꺼내 입고 모자를 덧쓰고는 총총걸음으로 사라오름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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