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근원지는 어디이며 무엇에서 비롯됐는가. 태초의 역사를 찾아 태백산으로 향한다. 널리 인간을 다스려 이롭게 할 만한 근거지로 삼위태백(三危太伯)을 택한 환인은 한울님이다. 환인의 아들 환웅은 천부인 세 개와 하늘의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
환웅은 어느 날 사람이 되고 싶다는 곰과 호랑이에게 쑥 한 다발과 마늘 한 접을 주며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소원대로 사람이 되리라 한다. 금기 생활을 견뎌 낸 곰이 여자로 변신해 환웅과 결혼,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이시다. 단군이 한민족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을 일으킨 때는 기원전 2333년, 중국 요임금 시대다. 단군왕검은 1천5백 년 동안 어질고 슬기롭게 나라를 다스려 사람에게 복이 되고 덕이 되는 일을 힘써 베풀었다.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는 그렇게 열렸던 것.
신화는 한 민족의 집단 심성을 나타내는 전승의 문화라고 정의한다. 즉 원형적 설화로 그 속에는 민족 고유의 인생관 및 세계관과 우주관이 녹아있게 마련이다. 신화에는 역사상 근거나 이치에 합당한 과학적 이론과는 물론 거리가 있다. 그러나 어느 민족 없이 역사가 시작될 무렵 신격을 갖춘 인물을 숭배하고 받들면서 나름의 설화를 엮어낸다. 영국의 역사가 배러클러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사실에 바탕을 두었다 하더라도 엄밀히 말하면 결코 사실이 아니라 널리 인정되는 일련의 판단일 뿐"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역사와 신화의 경계 역시 모호해진다.
우상 숭배를 타기 하는 일부 편협한 시각이 상존하고는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 뭐래도 배달민족이고 단군의 자손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조상 없는 자손도 있을 수 없는 것.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권제의 <응제시주> 등에 실려있는 단군 건국에 관한 기록을 어찌 신화로만 일축해 버리겠는가.
아득한 옛적. 환웅이 홍익인간의 높은 뜻을 품고 내려왔다는 삼위 태백산. 우리 민족이 고래로 신령스러운 산으로 받들어 왔으며 정신적 고향으로 섬겨온 산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백두산이 그 산이라 하기도 하고 묘향산이라 하기도 한다. 구월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크게 밝은 산'이란 이름이 아무 데나 붙을 수는 없는 일이다. 태백산맥의 宗山이며 모산인 태백산. 예로부터 삼한의 명산이자 겨레의 聖山으로 숭앙받는 태백산은 토속신앙의 성지이기도 하다. 그뿐인가, 태백산 정상에는 한배검을 모신 천제단이 있어 해마다 개천절을 기해 제를 올린다.
마음의 텃밭이자 정신의 고향 같은 태백산으로 태초의 신화를 찾아 부산을 출발한 것은 밤 10시였다. 태백의 백단사 입구에 다다른 것은 이튿날 새벽 4시 반. 눈바람 휘몰아치는 산자락 어둠 속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한 채 산을 오른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 스패츠와 아이젠까지 동원된 야간 설산 등반이다.
희끄무레 여명이 밝아올 무렵 주목 군락지에 닿았다. 향나무 비슷한 노거수의 집단 군락지이다. 주목은 고산에서만 자생하는 수종으로 오연한 자태에 청청한 잎이 돋보이는 상록교목이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말대로 수령이 긴 편이자 목질이 뛰어나 상질의 조각목 대접을 받고 있는 주목이다. 그 나무를 대하니 어떤 일화가 생각난다.
일본의 국보 1호인 광륭사 목조 반가사유상은 일본인의 긍지이며 자존심 그 자체였다. 비례 조화의 미가 완벽한 최고 걸작품이라는 불그레한 목조 반가사유상. 그 불상의 조각 기법에 의문을 갖고 있던 모리구씨의 집요한 추적 끝에 목질이 한국의 봉화 땅 춘양에서만 나는 춘양목임을 확인해 낸다.
그 과정의 에피소드가 퍽 재미있다. 어떤 명분으로도 국보 1호에 손댈 수가 없었는데 마침 관람객의 실수로 턱에 고인 날렵한 손가락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장 비상이 걸리고 손가락은 다시 원상회복이 되었으나 그때 떨어진 미세한 나무 가루를 채취, 재질 실험을 한 결과 일본에는 없는 춘양목임을 밝혀낸 것. 뒤이어 성덕태자의 명복을 빌고자 신라에서 목불을 보냈다는 기록을 찾아내 문헌을 통한 확실한 고증을 받게 된다.
식민주의 사가와 국수주의 학자에 의해 은폐되고 왜곡된 역사의 진실. 그가 학문적 양심과 객관적 진리에 따라 사실을 사실로서 밝혀낸 그의 용단은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금동 미륵 반가사유상과는 친동기처럼 닮은 데다 머리의 관이며 의습까지 한 솜씨가 빚은 듯 흡사하다. 그 불상을 조성한 이는 결국 신라인이었으니 국보 1호조차 일본인들은 자기 것을 갖지 못한 셈이다.
주목과 철쭉 군락지를 지나 완만한 산기슭을 조금 오르니 금세 태백산 정상이다. 고산 다운 웅장미는 있으나 산 자체는 평범한 육산으로 자욱이 이어지는 산록이 발치에 엎드려 있다. 능선 따라 이어진 함백산, 백암산, 일월산, 청량산, 역시 산악국답다. 반도의 중추를 이루는 태백산맥에 소백산맥이 연달아 줄기를 쳐 보이는 것마다 산, 산이다. 하얗게 눈을 인 준봉 준령이 한결 신비롭고 장엄하게 보인다.
한배검 단군을 모신 천제단 앞에 옷깃 가다듬고 선다. 돌담 쌓듯 외곽을 이루고 있는 검은 돌, 납작납작한 산석을 다듬어 둥글게 담 올리고 중앙에 한배검이라 음각한 비가 서있는 제단을 모셨다. 그 위를 붉게 물들이며 아침 햇살이 구름 사이로 한줄기 비추인다. 사뭇 경건한 느낌이 스며든다.
이곳은 신라 7대 임금인 일성왕이 친히 납시어 산제를 올렸던 자리이며 기림왕 역시 여기서 망제를 지내자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스스로 항복해 왔다는 신령스러운 기록이 남겨진 곳이다. 고려와 조선조에도 방백 수령과 백성들이 제를 지냈으며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큰일에 앞서 여기에서 천제를 올렸다는 자리이다.
천제단 일대에는 나무 한그루 없다. 해발 1576m의 고지에는 둥글게 쌓인 단과 거칠 것 없는 산바람뿐이다. 그럼에도 아지 못할 외경감에 빠지게 한다. 천제단은 方과 圓으로 이루어져 천지를 나타내며 모든 조화가 거기서 비롯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더 이상의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징 그 자체인 천제단이다.
하산하는 길. 망경사 쪽으로 길을 잡았는데 내처 줄줄 미끄럼을 탄다. 정상 조금 아랫켠 양지에 단청 선명한 비각이 오두마니 서있다. 의외로 단종 비각이다. 비극의 군주였던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 사면이 물과 층암절벽에 막힌 육지 속의 외로운 섬이라 표현되는 청령포에 유배되어 마침내 그곳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내 죽거든 저 태백의 산신이 되과저" 했다는 유언대로 단종은 태백의 산신으로 모셔져 영월 쪽을 하염없이 굽어보고 있다. 바로 옆의 용정이라는 샘물은 만병통치 약수로 한겨울에도 아주 기운차게 흘러내린다. 그 물줄기 황지와 섞여 낙동강 발원지가 된다던가.
낙엽송 줄지어 선 산기슭을 엉금엉금 기다시피하다가 정오쯤에야 겨우 마을에 닿았다. 새해에야말로 '크게 밝은' 일로 한 해가 이어지기를 기원하며 백설 쌓인 태백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다시 소담스레 눈발이 내렸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