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야류를 보러 갔다. 스크랩해 둔 신문기사의 안내문보다 조금 늦게 선도패가 당도하면서 놀이판은 질펀해졌다. 동심원을 그리며 돌고 도는 장고소리 꽹과리 소리가 노송에 둘러싸인 수영사적공원 너른 마당가로 넘실거렸다. 맥없이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그 소리. 마치 주술사의 주문이듯 멀쩡한 대낮에도 최면에 걸린다. 더엉덩 덩더꿍, 노니는 장고채에 잇달아 놋쇠판이 쨍쨍 울리자 덩달아서 가슴이 뛴다. 제물에 흥이 올라 어깨 들썩거리며 발끝마저 가벼이 가락을 탄다. 타악기의 묘력은 그렇게 모든 이의 마음을 한 덩어리로 칭칭 동여매 주는 데 있는 것.
부산 수영야류는 탈춤이나 산대놀이와 같은 한국의 전통 가면극이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된, 일명 수영 들놀이는 가면극 중에서도 독특하게 전 후편으로 나뉘어 있다. 예전부터 수영지역 주민들이 다들 참여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동제(洞祭)의 일환이었다는 탈놀이다. 가면제작에 앞서 치성을 드리고 잔치가 파한 뒤엔 탈을 불사르는 과정이 그러하듯 원시 종교성이 강한 신성한 의식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셈이다. 수영야류의 탈놀이에는 반항적인 서민신분의 상징인 말뚝이를 비롯하여 허세뿐인 다섯 양반과 철 모르는 책방도령, 그리고 삼각 갈등구조를 보여주는 영감에다 할미와 제대각시가 등장한다. 그 외에도 영노라는 반인 반신인 괴물과 사자 범 등이 어우러진다.
이들이 제각각 배역에 따른 가면을 쓰고 한바탕 사설을 풀어나가거나 몸짓으로 극을 엮어 나간다. 사모관대에다 점잖은 풍모를 한 수양반, 홍안백발에 죽장을 든 차양반들이 보여주는 지배층의 표리부동함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처를 두고 첩실인 제대각시만을 총애하는 영감의 한눈팔기에 꼴딱 넘어가는 할미의 질투심은 나이가 들어도 못 말리는 본능적인 것. 하늘에서 내려온 험상궂은 영노는 양반을 차례로 잡아먹고 사자와 범은 서로 뒤엉클어지며 어르는 무언극을 장대하게 펼쳐나간다. 여러 역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건 울퉁불퉁 못난 탈을 쓴 말뚝이의 신랄한 풍자와 해학이다. 그의 걸쭉한 입심에 구경꾼들은 박장대소를 보내며 나름의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양반들의 무능과 허세와 탐욕을 빗대어 조롱하는 대사를 통해 짓밟히며 억눌려온 민중의 억압된 심사와 울분을 해소시키는데 통기구 역할을 해주는 까닭이다.
원래의 탈은 전쟁이나 사냥에 임하는 고대부족들이 상대를 위협 내지는 제압하고자 무서운 가면을 썼던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밖에는 벽사(僻邪)적 성격으로 영혼을 부르는 영매(靈媒)가 탈을 쓰고 굿을 주도하는 경우였다. 연회의 기능이 우선이었던 가면무도회가 열리는 서양의 경우, 그래서인지 가면이 대체로 독창적이며 애교스럽다. 베네치아의 관광기념품으로 흔한 것이 가면인데, 장식성이 가미된 아주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역사적 인물의 특징을 과장되게 부각시킨 북경의 가면들은 각기 개성이 또렷하다. 미국에서는 시월의 마지막 밤을 핼러윈 데이라 하여 아이들이 탈을 쓰고 집집을 돌며 과자를 얻는 놀이가 아직도 성행한다. 반면 우리의 탈놀이는 유교사회의 도덕규범 이면에서 벌어지는 온갖 부조리를 가면의 힘을 빌려 은유적으로 파헤치므로 힘없는 백성들의 심리적 세척작용을 대신해 왔다.
질탕히 펼쳐지던 탈놀이가 끝나자 더위 탓에 사람들은 서둘러 가면을 벗어젖힌다. 땀에 젖어 후줄근해진 장년의 남정네들이 대부분이다. 탈이 한 자리에 모여지자 문득, 땀 냄새에 전 탈 중의 하나를 써보고 싶어 진다. 어느 가면이 내게 적합할까. 여러 모양의 탈 가운데서 내게 어울리는 탈은 어느 것일까. 내 본질에 가까운 탈은 과연 어느 걸까, 속짐작으로 더듬어 본다.
평상시 속 빈 강정 마냥 겉만 그럴듯한 양반놀음을 즐겨 해온 나. 의젓하니 권위 있고 기품 어린 그 세계에 편입되고자 나 항상 기웃대 왔으나 자격미달임을 왜 모르랴. 영노에게 실컷 희롱당하다 종당엔 잡혀 먹히고 마는 양반일지라도, 내 왜소한 풍모 역시나 양반 역을 받쳐주지 않는다. 천민의식의 상징인 말뚝이의 직설에 가까운 언변은 물론, 뚝심이나 뱃장 또한 애시당초 없으니 그도 어울리긴 글렀다. 엉거주춤 두 다리 걸친 우유부단한 영감도 거북살스러워 내키지 않긴 마찬가지. 간드러진 제대각시의 쌍무 솜씨를 따라잡기엔 내 실력으론 어림없다. 질투에 불타다 죽어 나가는 할미 역은 어쩐지 심란스럽다. 보기만 해도 다들 겁먹는 영노 탈을 써볼까. 으르렁 포효하는 사자나 범의 탈을 덮어써볼까.
가끔씩 나 아닌 또 다른 인물로서의 내가 되고 싶을 적이 있었다. 현재의 나로부터 멀찍이 떠나고 싶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탈 뒤에 자신을 숨기고 싶을 적이 수도 없이 많았으니. 心想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표정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주어진 배역이 맘에 들지 않아도 평생을 업으로 알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자신의 한계에 새삼 연민이 솟는다.
탈 무더기 가운데서 하나를 집어든다. 얼른 탈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본래의 내 모습도, 표정도 죄다 감춰진다. 아늑하니 편하다. 이대로 영원히 묻히고 싶다. 슬쩍 사라지고 싶다. 존재하되 부재하는 나. 나는 아무 데도 없다. 누구네 딸도, 아내도, 엄마도 아닌 또 하나의 낯선 내가 허심히 웃는다. 그렇다, 실제의 나는 이렇듯 여럿이다.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