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의 길고 긴 겨울, 부엉이 우는 밤이면 문풍지도 따라 울었지요. 등잔불 가물거리는 깊은 밤, 심심하기 그지없는 손주가 할머니 졸라 듣던 옛이야기는 늘 이렇게 시작되었어요. 아주 멀고 먼 옛날 고릿적에..... 아득히 멀다는 그 옛날은 아마도 고려 시대를 이르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오늘 만나고자 하는 분은 고려적 仙人이신 겸효 어르신입니다. 시정의 오탁을 멀리한 채 인간계를 떠나 학과 더불어 노니는 신선, 도가의 이상적인 인물이지요. 그 신선이 우리 동네와 인연 닿았다 하니 절로 호기심이 일 수밖에요. 혹 아시는지? 부산 8경에 겸효대가 있다는 것을. 동국여지승람에 동래부 남쪽 5리쯤에 위치한 척산 (지금의 배산) 위에 겸효대가 있는데 여기에 선인 김겸효가 논 바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곳. 지금은 하얗게 지워진 자취인 겸효대. 그 장소를 유추해 보며 어른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자 나선 길입니다.
1366년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랍니다. 요승 신돈을 탄핵했다가 동래 현령으로 좌천되어 내려온 정추란 분이 있었대요. 좌사의대부란 관직을 박탈당하고 영락없이 죽을 목숨인데 그나마 이색 선생의 도움으로 동래로 내려오며 한직에 밀려난 정추. 시문을 즐기는 사대부답게 '겸효대' 시를 남긴 것이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는 걸로 봐서 선인 겸효 이야기가 호사가들이 지어낸 전설은 아닐 시 분명합니다.
세월을 잘못 만나 경륜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은거해야 하는 대장부 통분이 어떠했을까요. 그나마 삭힐 수 있었던 것은 신선되어 사는 겸효와의 가슴 튼 교유 덕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산간에 살며 불로장생의 신통력을 지녔다는 선객. 신선은 심신수련으로 도를 닦아 현묘한 경지에 다다른 사람을 이름이지요. "겸효의 밝은 빛은 연꽃을 닮고/가슴으로 품은 기운 속세를 떠났구나" 라고 읊었던 정추의 뒤를 이어 훗날 이 백 년 뒤에 동래부사 윤훤이 다시 이와 관련된 시를 남겼지요. "밝은 빛 연꽃이 맑은 물에서 나듯/천고의 사람들은 서로가 닮았는데/겸효는 이미 백운 타고 떠나고/세간은 공허한데 정추의 시만 남았구나" 이렇게요.
구름처럼 바람처럼 걸림 없이 산다는 신선. 이슬만으로 천년을 사는 선인 되어 천의무봉의 옷자락 날리며 흰 수염 나부끼며 유유자적 배산을 오갔다는 겸효 어르신. 어르신이 정추와 자주 만나 마음을 나눴다는 겸효대가 어디 짬인지 그 자리를 짚어보려 오늘은 작정하고 오른 배산입니다. 새소리로든 바람결로든 당신이 즐겨 노닐던 그 자리로 저를 인도해 주십사 하는 소원을 외우며 산길을 올랐지요. 윤기 자르르한 억새 은발 빗질해 내리는 가을 배산을요. 숲에서 산비둘기가 웁니다. 길가 풀섶에선지 땅속에선지 찌르르ㅡ 또르르ㅡ 벌레소리가 들립니다. 깊어가는 가을을 알리는 그 소리가 마치 지하의 혼령들이 작은 방울을 흔들어 대듯 하였지요.
장자는 만물의 끝없는 유전을 일러 물화(物化)라 하였습니다. 영겁토록 다함없이 돌고 도는 중생사. 겸효 어르신은 뉘시며 오늘의 나는 또 누구입니까. 제가 그분 그리며 자취 더듬는 데는 무언가 아지 못할 전생의 인연 고리가 있어서는 아닐지요. 세상 이치라는 참으로 묘합디다. 아무런 인과관계없이 그저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이란 없다고 해요. 무심히 스치는 듯싶은 바람도 나와 만날 인연이 지어졌기에 내 곁을 스쳐가거늘. 무릇 모든 만남의 소치는 인연의 귀결입니다. 제가 당시는 겸효 어르신을 따르던 백학일 수도 있구요, 앉아 쉬던 고목 등걸일 수도 있구요, 아니면 어르신과 교유하며 시를 읊던 정추일 수는 없으리까. 그도 아니면 무엇이 저를 이리 이끌어 그대 그리게 하겠습니까.
겸효 어르신, 제가 배산 기슭에 터를 잡고 산 지도 어언 열다섯 해가 넘었는데 진작 찾아뵙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워낙 과문한 탓에 부산의 뛰어난 명승지라면 해운대 태종대나 들먹거렸지 정작 마을 뒤편에 위치한 겸효대를 안 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답니다. 배산, 그간은 솔직히 크기나 높이로 봐 내심 얕잡아본 예사로운 뒷동산 정도였지요. 헌데 거기에 학과 더불어 선경에서 노니는 신선이 유했다니 놀랍기만 했답니다. 신선도를 보면 구름 드리운 심산유곡 폭포 내리는 노송 아래 선경 같은 곳에 신령스런 그분은 사시던데....
신선이 머문 자리, 가까운 신선대도 제쳐놓고 항시 운무에 싸인 봉래산도 저만치 놔두시고요. 어찌하여 야트막한 야산인 배산에 선인이 머물렀는지 자꾸만 고개 갸웃거려졌지요. 그래도 믿을만한 기록으로 남겨진 까닭에 과연 어디 짬이 겸효대인지 두루 산을 더듬어 나갔지요. 아무래도 정상 언저리가 아닐까 여겨져 산정으로 올랐습니다. 제법 거친 숨이 토해졌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약간 가풀막졌기 때문이지요. 해발 3백 여 미터 정도의 낮은 산인 요량하고는 전망이 아주 끝내줍니다. 남으로 탁 트인 바다. 광안리가 한눈에 들고 해운대는 비스듬 좌측으로 안겨듭니다. 동으로는 듬직한 장산 발치에 수영강이 유유히 흐릅니다. 서로는 가야 벌을 주욱 빠져나가 낙동강에 이르고 북으로는 금정산에 싸인 안온한 동래가 펼쳐져 있습니다.
잠시 숨 고를 겸 해서 정상의 커다랗고 모양 좋은 바위에 앉아봅니다. 사방을 두루 조망해 보니 아, 그래! 절로 무릎을 치게 됩니다. 수없이 와본 곳이건만 생각이 그럴싸해서인지 충분히 대(臺)라 칭할만한 위치이자 장소입니다. 지형을 살피면 배산 역시나 옛적엔 바다에 뜬 섬이었을 게 확실합니다. 선연히 한눈에 그려지는 그림 한 점. 그 옛날의 배산은 섬이었습니다. 틀림없이 해 바르고 인적 드문 푸른 섬이었을 테니 신선이 머물만한 곳이었겠지요. 지금은 시가지가 되어 있지만 오래전 바닷속이었을 저 아래 동네. 설설 기는 게 대신 자동차가 바삐 오가고 굴이며 조개 대신 집들이 따개비 붙듯 들어차 있으며 물고기 대신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마을로 변해있는 지금. 충렬사에 걸린 <동래 항전도>란 그림에도 나타나있듯 동래성 바로 아래서 흰 파도가 일렁댑디다. 부산포 옛 기록사진에 나타난 자성대 무릎께도 바닷물이 남실댔구요.
'산이 높지 않더라도 그 안에 신선이 살면 좋은 산'이라고 唐 대의 시인 유우석이 남긴 陋室銘은 이르지 않던가요. 높지 않아도 배산은 필시 명산 대접을 받을만한 산이었더라구요. 옷깃 고쳐 다시금 앉은자리를 둘러보니 주위를 선회하던 호랑나비 한 마리가 바위 끝에 살몃 머물며 날개를 접습니다. 영혼처럼 나풀나풀 어디선가 가벼이 날아와 꽃도 아닌 차가운 바위 모서리, 제 면전에 앉은 나비. 다시금 그대에게도 묻고자 합니다. 대관절 오늘의 저는 누구이며 그대는 어느 적 뉘시온지?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였습니다. 가을이 가고 나면 문풍지 우는 겨울이 올 테지요. -1998-
귀국해 보니 2017년부터 부산박물관에서 배산성지(盃山城址)를 발굴조사 중이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