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꽃 곁에서

1986

by 무량화


뜨락이 없는 대신 베란다에 놓인 몇 개의 화분들.

그네들이 요즘 봄을 알리기 위해 한창 바쁘다.

아열대성 관엽식물의 변화는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꽃석류 앙상했던 가지에 발그레 연한 새순들이 함빡 돋아났다.

뿐만 아니다. 수선과 창포가 한 뼘쯤 키 돋우고 섰는가 하면 찔레나무 화분에 연두색 풀물이 수채화로 번져간다.



오늘 아침, 그네들에게 물을 주다 보니 창포 뿌리짬에 의외의 꽃이 피어 있었다.

반지꽃, 시골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보랏빛 자그마한 꽃.

그것이 고 귀엽고 앙징스런 꽃잎을 열고 있었다. 한꺼번에 세 송이씩이나.

지난해 봄.

절에 다녀오는 길에 쑥을 뜯다가 풀섶에 무성한 반지꽃을 보고 포기째 옴폭 떠다가 화분에 심은 적이 있었다.

초여름까지 그 반지꽃에서 꽃대가 올라와 계속 꽃이 피고 지더니 씨앗을 화분에 묻었던 모양이다.

제 스스로 땅에 묻혀 겨울을 나고 양광을 기려 피어난 작은 꽃.

순간, 오묘한 자연의 섭리 앞에 숙연한 느낌마저 들었다.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하신 가람 선생님 속뜰이 이러했을까.

새삼 생명의 신비, 우주의 질서를 체감할 수 있었다.



지금은 갓 우수가 지난 조춘.

아직 창밖은 겨울의 잔해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 남향 베란다는 그대로 봄이다.

하루가 다르게 꽃망울 실해지는 매화 그늘에는 괭이밥 이쁜 잎이 소복하다.

보이지 않는 잔 바람에 호르르 나부끼는 반지꽃이 괭이밥을 향해 귓속말이라도 전하는 것일까.

소곤대듯 살풋 고개 숙인 반지꽃에 괭이밥이 짐짓 귀를 기울인다. ​

그네들의 모습에서 나는 단발머리 나풀대는 예닐곱 살의 소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양지녘에 모여 소꿉놀이할 때면 사금파리에 차린 산수유 자잔한 꽃은 밥이 되고 쇠뜨기 돌나물은 반찬으로 차려져 반반한 돌멩이 상 위에 올랐다.

반지꽃으론 새끼손가락에 보랏빛 반지를 만들어 끼고는 개나리 노란 꽃을 머리에 비껴 꽂은 채 각시가 되던 소녀. ​

소꿉질이 시들해지면 이내 바구니 찾아들고 들로 나갔다.

보리밭 이랑에서 달래를 캐고 밭둑 따라 나물을 뜯던 어릴 적의 내 모습이 아스라하다.



그즈음, 얼음 풀린 냇가에서 외숙모의 빨래방망이 소리 들려왔고 주변의 버들강아지는 한결 도톰해 있었다.

삐릴리~ 창칼로 잘 다듬은 버들피리 불며 아지랑이 오르는 봄 언덕에서 뛰놀던 시절. ​​

안개이듯 순하게 봄비라도 내리는 아침이면 화단에
꽃씨를 뿌리며 조잘거리는 작은 손길들로 마당 가득 생기가 넘쳤다.


삽으로 갈아 엎어놓은 텃밭에선 흙냄새가 마치 잘 띄운 누룩내처럼 구수하게 번져나곤 했다.

앵두꽃 망울이 부풀고 다랑밭 장다리꽃이 노란 나비를 부를 즈음, 뒤꼍을 둘러싼 대숲은 훨씬 청청해 있었다. ​

시골에서 자란 사람의 경우, 대부분 가슴에 안았을 이러한 추억들.

자운영을 알고 꽃다지를 알고 조바위 같은 할미꽃과 다정히 지냈다면 모두 친구가 되어도 좋으리.

거기에 반지꽃을 좋아했다면 더 말해 무엇할까.​



제철이기엔 좀 이른 지금.

우리 집에 피어난 반지꽃은 확실히 진객(珍客)이다.

앞당겨 봄을 가져다주듯 어쩌면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마을 어귀 소나무 숲에 온 학이 아니어도
진보랏빛 조그만 꽃에서 느껴지는 어떤 예감.

내게 있어 적어도 그 반지꽃은 알라딘의 램프처럼 소망을 이뤄주는 경이로운 존재만 같으니. ​



민들레와 함께 초봄 들녘에 피어나는 반지꽃.

일명 제비꽃이라고도 한다.

반지를 만들어 끼기 때문에 반지꽃이라 부른다면
삼짇날 강남제비를 맞는 꽃이라서 제비꽃일까.

게다가 바이올렛이라는 또 다른 이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중년이 되어도 마음 항상 맑기만 한 내 친구의 세례명처럼 고운 이름이 바이올렛이다.

허나 오랑캐꽃이라는 별칭은 수긍이 안 간다.

이렇듯 조촐하니 수줍은 꽃이 어찌해서 변방의 야만족이란 이름이 되었을까.

날씨 풀려 반지꽃 필 무렵이면 국경 침노하는 오랑캐 때문인가,

분명 그럴만한 연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쉬 짐작할 수 없는 이름이다.



하여튼 반지꽃은 내 식대로 언제나 반지꽃이라 불릴 것이다.

차마 한줄기 따내어 반지를 만들 순 없지만 마음속에 끼어보는 반지인들 어떠랴. ​

반지꽃. 봄을 여는 꽃이며 또한 고향을 그리게 하고 유년의 회상에 젖게 하는 그런 꽃.

화분 한켠에 핀 그 꽃이 내겐 향 유심(幽深)한 춘란이나 고아한 매화보다 한결 소중히 여겨진다.

아무런 돌봄도 받지 않고 저 홀로 싹 틔워 피어난 꽃임에 그러하고 우리 집에 핀 첫 번째 꽃이기 때문이다. ​

한동안 반지꽃에 시선 주고 있노라니 하늘하늘한 줄기 끝에 살몃 치켜든 두 장의 꽃잎과 다소곳 펼쳐진 꽃잎 셋이서 나지막이 노래라도 부를 것 같다.

어릴 적 그 노래 <고향의 봄>을.......

​1986년 조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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