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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까치설날

by 무량화


아주 오래전 유년의 충청도 시골. 눈이 흔한 지역이라 섣달은 내내 하얀 눈 속에 파묻혀 지냈다. 물 묻은 손으로 방문 고리를 잡으면 손끝이 척척 달라붙을 만치 깡추위도 대단했다. 방학 중인 꼬맹이들은 겨울 한파쯤 아랑곳 않고, 주로 마을 무논 얼음판에서 썰매 타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짬짬 팽이치기도 신이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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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동 한복판. 울긋불긋 설빔 감이며 제수품 수북 쌓인 대목장이 서면서부터 슬슬 설날은 가까이 다가왔다. 나남 없이 궁핍한 살림이라 어른들 속은 설맞이 대비할 일로 수심이 쌓였을 테지만. 전쟁 후유증으로 심히 피폐했던 50년대, 가난은 그저 생활의 일부였던 당시다. 그래도 포목점에서 끊어온 호박단 천으로 남치마에 색동저고리 설빔을 곱다라니 지어주던 엄마. 예쁜 섶을 뽑기 위해 고개 갸웃하던 그 화롯가의 엄마는 젊디 젊었더랬는데... 윗목에는 검정 보자기 덮인 시루 속 콩나물이 조금씩 키를 세워갔고 내 책상 위 작은 화병에는 찔레 열매가 사철나무 푸른 가지 사이에서 유독 붉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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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준비 1단계로 제일 먼저 엄마는 놋 제기부터 꺼내서 닦기 시작했다. 종갓집이라 일 년에 아홉 번씩이나 제사를 모셔야 하는 우리 집엔 놋 제기가 나무 상자에 수북했다. 놋그릇이란 게 얼마나 인력을 고달프게 하는지, 일단 한번 쓰고 나면 색이 변할뿐더러 시퍼러이 녹도 슬어버렸다. 해서 쓸 때마다 번번 야무치게 문질러 닦아주는 공력이 예삿일 아니었다. 기왓장을 잘게 빻아 체에 내려 고운 가루만을 받아쓰거나 아궁이의 속재를 모아 연마제 대용으로 썼다. 물에 축인 짚쑤세기에 보드라운 가루를 묻혀 팔힘을 최대한으로 쓰면서 놋그릇 안팎을 골고루 쓱쓱 싹싹~공들여 문대고 닦아 광을 냈다. 말끔히 씻고도 마감으로 뜨건 물에 헹군 후 채반에 얹어 물기를 말렸는데 그때 반짝이는 그릇에서 풍기던 특유의 놋내. 그 많은 제기를 다 닦자면 짧은 겨울해로는 온 하루가 다 걸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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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할 일은 엿, 조청 만들기다. 젯상에 오르는 바삭바삭 산자나 달콤한 약과를 묻힐 때도 쓰일 뿐 아니라 떡가래며 절편, 인절미를 찍어 먹기 위해 거의 집집마다 엿을 고았다. 첫 순서는 엿기름 가라앉혀 윗물을 낸 뒤 꼬두밥에 붓고 식혜 만들듯 뭉근하게 장작불 조절해 가며 밥알부터 삭혀야 한다. 식혜밥이 다 되면 베보자기에 짜서 그 단물만 졸여 엿 색으로 변할 때까지 장작불을 지피며 엿물 젓던 엄마 곁에서 부지깽이로 불장난이나 하던 철부지 어린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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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일주일쯤으로 다가오면 엄마는 차례상에 올릴 나박김치를 담갔다. 수북이 눈 쌓인 밭 한가운데 무광 입구를 가늠해 삽으로 척척 눈길 헤쳐 열고는 노오란 통배추와 순이 웃자란 무와 대파를 꺼내 손질해서 얼음같이 찬 물에다 씻었다, 빨개진 손으로 엄마는 시원하고도 맛깔스러운 나박김치 한 단지를 담아놓았다. 또한 수정과에 쓸 계피 물도 색깔 곱게 우러나도록 끓여두고 곶감도 손질해 놓고 산자에 튀밥도 묻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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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이 코앞에 다가오면 멥쌀을 정하게 씻어 하룻밤 불려뒀다가 떡가래 뽑으려 방앗간으로 향했다. 발동기 소리 힘차게 들리는 방앗간에서는 떡 찌는 김이 뭉클뭉클 밀려 나왔다. 이미 길게 줄나래비를 선 행렬의 맨 끝에 우리도 얼른 붙어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서리서리 떡가래를 뽑아주면 머릿밑 뜨거운 함지를 이고 돌아왔다. 집에 와 일단 차례 지낼 떡부터 정하게 따로 갈라 두었다. 그다음 물렁한 떡가래를 손으로 뚝 떼어 조청에 찍어 먹던 그 맛이라니.... 떡가래는 썰기 좋을만치 적당히 굳힌 뒤 떡국용으로 얄신얄신 어슷 썰어 함지에 담았다. 이때 시간 조절을 잘해야 칼질이 용이하지 자칫 지체될 경우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히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수고 다 생략, 완성된 떡이 비닐봉지에 담겨 판매대에서 기다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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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척 구분 안 되게 뽀야니 수증기 서린 대중목욕탕. 복잡하게 붐비는 대중탕에 들러 설치레 목욕도 죄다 들 다녀왔다. 까치설날엔 이른 아침부터 집안팎 세밑 대청소로 바빴다. 뼛속 깊이까지 시린 삼동의 혹한. 그 속에서도 차례 음식은 한 가지씩 만들어졌으니, 무쇠솥뚜껑 뒤집어 들기름 둘둘 돌려 갖가지 전을 부치노라면 담장 넘어 온 마을로 감돌아 퍼지던 고소한 내음. 놋노라니 조기를 굽고 수육 거리도 삶아놨다. 마무리로는 떡국에 쓸 곰국물 고와놓고 지단 부쳐 색색 고명도 곱게 채 썰어 두었다. 우리 동네보다 더 깊은 시골에서는 돼지를 잡았더랬는데, 이제는 죄다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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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곱게 설빔으로 치장한 후 차례부터 모셨다. 그다음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면 덕담과 함께 내려지던 세뱃돈. 빳빳한 새 돈 받아 복주머니에 챙기노라면 너나없이 부자가 따로 없던 그 시절. 세시풍속 따라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로 정월 대보름까지 즐거운 명절은 이어졌는데... 타국살이 이후, 항상 명절 즈음이면 들곤 하는 이 묘한 느낌. 수수함이랄까, 쓸쓸함이랄까, 딱히 무어라 형언키 어려운 기분에 휩싸인 채 하릴없이 옛 추억에나 젖어본다. 아득해서 더욱 그리운 그 시절, 지나간 시간은 모두가 아름다움으로 윤색되기 마련인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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