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연일 폭설 오락가락, 사골국이나 우려야
낙동강을 지나면 바로 드넓은 김해평야다.
가락국 오백 년 왕도(王都)였던 그 김해를 다녀왔다.
푸른 하늘에 양떼구름 새털구름 다채로이 피어나 밖으로 나오라 손짓하던 날.
드맑은 가을 날씨에 대한 예우상 외출하기로 작정하고 낙동강도 구경할 겸 수로왕릉을 다녀오기로 했다.
덕분에 부산에서 김해를 연결하는 경전선도 처음으로 타보았다.
지하철이 아닌 지상철인 데다 두 량만 달린 귀여운 미니 전철로 로스앤젤레스의 명물 엔젤스 플라이트가 연상됐다.
김해 시청 다음 역인 부원역에서 내려 가야국 왕도였던 김해시의 중심부를 두리번거리며 걸어 올라갔다.
마치 스페인이나 타일랜드 같은 낯선 이역을 걸어가는 듯 어디가 어딘지 전혀 분간이 안 됐다.
부산의 이태원 혹은 부산의 안산이라 부를 정도로 공단이 많은 김해엔 동남아 사람들이 하도 흔해서였다.
90년대 초, 경성대 박물관 팀과 대성동 고분 발굴 현장을 돌아봤고 김해 박물관도 두어 차례 들렀는데 타국처럼 생소한 거리.
급격한 변화로 상전벽해 고사를 곱씹게 하는 대한민국이긴 하나 파밭뿐이던 김해의 변신은 더더욱 놀랍더라는.
낙동강 하류 삼각주에 위치한 김해는 토질이 비옥하여 농수산물이 풍부했다.
하여 고래로부터 여러 부족들이 모둠살이를 하던 지역이다.
신석기 중기부터 김해만에 깃들어 살던 그들은 삶의 자취로 숱한 패총과 고분을 남겨 놓았다.
김해는 특히 가야의 얼과 자취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곳.
90년도 가을, 대성동 고분 발굴 당시 경성대 박물관 팀을 이끌던 신 교수를 따라 드나든 김해.
활동 활발했던 부산박물관학회 일원으로서였다.
멀지 않은 곳에 구지봉과 수로왕릉이 있고 회현리 패총 근처인 대성동 고분은 띠풀도 듬성했다.
완만한 구릉을 휘덮다시피 양지바른 위치에 드넓게 자리 잡았던 발굴 현장은 붉은 황토 빛깔로 떠오른다.
그 속에서 대량으로 토기가 발굴됐다.
이어서 덩이쇠가 쏟아져 나오며 번성했던 철기문화를 고증해 줬다.
철제 무기류, 갑옷류, 마구류들이 다량 출토되며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던 사적 제341호인 대성동 고분.
무엇보다 임나일본부설을 일거에 종식시키는 대성과를 거뒀다고 환호했던 기억 선연하다.
왜 왕이 한반도 남쪽을 지배해 왔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 일본서기에 실린 임나일본부설은 이후 학계에서 폐기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실로 굳어지던 임나일본부의 존재는 해방 후에도 고고학계의 역량 부족으로 회피해 온 문제였다.
그러다 대성동 고분과 복천동 고분이 차례로 발굴되며 유물들이 빛을 보자 그 성과는 예상 뛰어넘을 만큼 대단히 놀라웠다.
반증할 수 있는 가야 유적 유물 등 고고학적 물증이 속속 등장함으로 허구였던 임나일본부란 종전의 통설은 종식됐다.
문자로 기록된 사료가 부족한 상고사의 경우, 이처럼 철제 비늘 갑옷과 철제 무기류와 마구류 등의 출토유물이 말을 걸어왔던 것.
그리고 정설을 뒤집어 놓았다, 하여 선대들이 남긴 유물과 유적이 모두가 다 중요한 보물이다.
비록 역사에 새겨진 기록 미미하나, 이렇듯 수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어 신화를 실제 문명으로서의 가야사로 증명해 주었다.
김해 시내에서 구지봉 가는 길목.
허름한 마을 안쪽 언덕 위에 김해향교는 홍살문을 앞에 두고 높직이 정좌해 있었다.
앞뜰 우측 둔덕에는 늠름한 노거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은행나무는 재질이 단단하고 병충해를 입지 않는 강건한 나무로 쓰임새 큰 홍익인간의 표상이라고.
식물임에도 암수가 따로, 즉 남녀유별의 상징이기도 한 나무가 은행나무이기도 하다고.
향교마다 심은 은행나무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행단(杏檀)에서 유래했다.
유학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인륜의 명분인 인의예지에 대해 가르치나 실상은 과거시험 준비하는 유생들 교육장이었다.
갑오경장 이후 과거제가 폐지되자 향교에서는 문묘향사를 거행하는 기능만을 이어왔다.
현재 중심 건물인 대성전에 공자의 위패를 중앙에 봉안하고 좌·우에 대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유학의 센터 격인 향교다.
김해향교가 창건된 연도는 고려 인종 5년인 1127년이라고 한다.
조선 태종 8년 지금의 동상동에 있다가 다전동으로 옮겼다고도 전해진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조선 선조 33년에 부사 정기남이 옛 김해부 동쪽 다전동에 중건하였다는 등 여러 가지 설도 있다.
향교 문은 역시 굳게 닫혀있었다.
초입 풍화루 주변에서 오락가락하며 담 너머로 안을 기웃거렸다.
명륜당과 동재 서재만 겨우 사진에 담았을 뿐 안쪽 깊숙한 대성전은 물론 내삼문도 대충 위치 짐작뿐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7호인 향교는 다들 알다시피 원래 지방 교육기관이었다.
강학 장소인 명륜당이 중심에 있고 좌우에 학생들 기숙사인 동재 서재가 배치돼 있다.
유교의 핵심 정신인 명륜은 윤리를 밝힌다는 뜻임에도 동재는 양반 자제가, 서재는 평민 중 부호 집 자제 거처였다.
신분 상승에 제약이 따르는 졸들은 예나 이제나 시대가 바뀌었다 해도 여전히 개구리 붕어로 살아야 하는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명 연예인이나 잘 나가는 운동선수나 금수저 출신 외는 비리 카르텔과 줄 대지 않고서야 금방석은 요원.
다행히 4차 산업혁명에 따라 지능정보사회를 이끄는 젊은 신진 재력가들이 등장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정기 뛰어난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구지봉.
구지봉 오르는 길.
허왕후가 남방에서 차 씨를 가져왔다는 전설대로 지금도 흰꽃 핀 차나무 유독 짙푸렀다.
나지막한 동산에는 노송만 숲을 이뤘다.
구지봉 소나무 옆 둥근 바위가 설화 속 황금알을 연상시킬 뿐 의외로 평이한 산길이다.
무언가 영험스런 기운을 기대했더라면 저으기 실망이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이끌려 구지봉에 올라보니 금합 속의 황금알 여섯 개.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으로 화(化) 한 수로가 가락국을 세우니 서기 42년의 일이다.
남해안 일원에서 세력을 늘려가며 고유의 문화를 일궈온 가야.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삼국유사에 가락국 기와 금관성 파사석탑조에 그 족적이 약간 비칠 따름이다.
오백 년에 이르던 가야 왕조의 치세 역사는 간데없어지고 단지 몇 문장 기록으로 남아있으니.
일연 스님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일 때 시조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왔다'라고 간략히 썼을 뿐이다.
가야의 건국신화 출발점인 황금알이 하강했다고 전해지는 구지봉 정상은 별다른 특이점 없이 밋밋했다.
황금껍질 흔적이라도 남았을까 아마 그런 상상을 했다면 또한 허전했을지도.
다만 고인돌 한 기가 덮개석을 이고 정상 언저리에 앉아있는데 기원전 4~5세기경 인근 마을을 다스리던 족장묘로 추정된다고.
하강터 표식인 듯 두리넓적한 평지에 돌을 원형선 따라 박아놓았다.
어쩐지 그 안을 걸어보는 일은 삼가야 할 것 같은 느낌.
가야 건국신화 출발점인 황금알이 하강했다고 전해지는 구지봉이다.
문득 오후 바람이 이마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정신이 번뜩 차려졌다.
돌아갈 길 떠올리며 발걸음 재촉했다.
구지봉 입구 표지석/구지가(龜旨歌)인 영대왕가비(迎大王歌碑)/근처에 있는 남방식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유물로 龜旨峰石이란 한석봉 글씨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