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내내 날씨가 궂더니 입춘 지났어도 폭설에 한파 이어져 방콕모드였는데 이날은 반짝 쾌청.
칩거를 풀고 동쪽으로 길을 잡았다.
하늘빛 푸르니 바다색도 덩달아 짙푸르다.
근자 들어 날씨만 좋으면 무작정 발길 가닿는 곳이 성산일출봉과 산방산이다.
한 시간 넘는 거리임에도 거의 '걸핏하면' 자석에 이끌리듯 간다.
곰곰 생각해 보니 두 장소 다, 지난해 제주에 왔던 아들과 딸이랑 같이 트레킹을 다녀온 곳이다.
어쩌면 그래서인가 싶으다.
이번에도 일출봉 올랐다가 해맞이 해안로 따라 하도리 철새 도래지까지 걷기로 했다.
바다와 인접한 염습지로 담수와 해수가 섞여 풍부한 먹잇감을 품은 데다 습지식물이 서식처를 제공해 주는 곳.
철새들이 월동하기 좋은 환경일뿐더러 텃새도 물론 많이 몰려들겠다.
지미오름을 배경으로 한 물가는 탐스러운 마른 갈대에 감싸여 아늑했다.
겨울을 나려고 찾아온 여러 종의 새들이 습지에서 평화롭게 노닐고 있었다.
청둥오리 백로 물수리 쇠기러기 저어새 고니 해오라기 도요새 논병아리 가마우지 등등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는 날이 새들 초상날.
며칠 전 죽은 물병아리와 고방오리가 여기서 발견돼 조사한 결과 고병원성 AI 바이러스(조류인플루엔자)가 검출되며 온통 비상.
출입통제 띠가 둘러쳐져 있고 입구에 인근 소독을 위한 가축 방역 차량과 분무 장비가 동원돼 있었다.
마을길로 들어왔기에 그쪽에선 전혀 분위기 파악이 안 됐는데 전망대가 있는 입구 쪽은 초긴장 상태였다.
이러다 미국처럼 계란값 마구 치솟는 거 아냐.
코로나나 마찬가지로 세상을 제멋대로 헤집고 다니는 이눔의 바이러스는, 스페이스 X가 앞장서 우주탐사도 하는 첨단과학시대에 어이해 막지 못할까.
재빨리 도래지를 벗어나 하도 해수욕장으로 내려갔다.
남태평양 섬 풍경이듯 활처럼 휜 은모랫벌 그리고 피콕블루, 민트 블루, 베이비 블루에 청남빛인 바다색 정녕 환상적이었다.
봄바다처럼 파도 순한 데다 저 건너편 우도는 종달리와 이마 맞댄 채 귓속말 나누고 있었다.
투명히 맑은 바다와 벌집같이 기묘하게 고망난 현무암 도처에 깔린 해변에 취해 찜찜하던 조류 AI 사태는 시나브로 잊혀졌다.
월령리 선인장만큼 대단한 규모는 아니나 여기도 간간 해안가에 선인장 무더기가 나타났다.
도로변에서 문주란도 흔히 만났다.
맞다! 곧이어 문주란 자생지인 토끼섬이 드러날 차례다.
해맞이 해안로를 타고 봄바람 느낌이 나는 훈풍 데불고 걷다 보니 저만치 토끼섬이 나타났다.
해안에 들쭉날쭉 빌레(현무암 너럭바위)가 유독 많아 멜튼개도 존재한다.
밀물 때 들어온 멜(멸치)을 갯담에 가두어 잡는 원시 어로 유적터인 멜튼개다.
토끼섬은 직접 건너가 본 적은 없지만 가까이 다가가 관찰은 해봤다.
섬 주변을 둘러싼 모래사장과 역시나 연둣빛 문주란 군락지 확연히 드러났었다.
그때도 조금만 일찍 갔더라면 얕은 물길로 건널 수 있었을 텐데 밀물이 차 들어와 그만둔 바 있다.
새하얗게 피어난 문주란 향기 섬에 가득할 때 미리 물때 확인해 뒀다가 건너볼 참이다.
제주섬 어딘들 왜구 집적대지 않은 땅 있을까.
동쪽 하도 귤동 바닷가도 마찬가지라 예외 없이 백성들 지키려 바윗돌로 둘러쌓은 환해장성.
섬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시대부터 쌓은 석축으로 제주도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됐다.
끊긴 채 부분 부분 남아있는 장성, 그런데 여기다 이 무슨 망령된 작태인가.
해양 쓰레기를 수거해 장성 뒤편에 볼썽사납게 한가득 쌓아뒀다.
어쩌면 설 연휴와 맞물려 미처 마무리 작업을 못했을 수도 있으렷다.
트럭 대여섯 대 분량의 많은 쓰레기라 일단 수거까지는 해놨으나 차량 지원에 차질이 생겼을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언필칭 부르짖는 관광 제주 구호는 어디로?
이런 걸 보고 툴툴거리며 불평이나 욕만 할 게 아니라 빠른 시정을 촉구하기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
고발이나 신고는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지만 공공선을 위해서다.
깨시민이라면 잘못된 것을 보면 응당 담당기관에 적극적으로 시정 요청을 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해맞이 해안로는 바닷가를 따라 여전히 이어졌다.
도중에 하도리 각시당을 지났다.
밖에서는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었는데 음력 2월 13일 해녀들의 안전 조업과 어부들은 풍어 기원하는 영등굿 용왕맞이를 한다고.
연달아 신동코지 불턱을 만나 잠시 기웃거려 보았다.
장방형으로 반듯하게 축조된, 거의 어느 해안가나 비슷하게 생긴 외형.
불턱은 해녀들 탈의실 겸 매운 추위 녹여주는 장소라 중요하다.
안에 불 피웠던 흔적이 남아있어 그나마 이 불턱은 실제적으로 다가왔다.
포구 옆, 갈매기 무리가 바윗전에 앉았기에 조심스럽게 움직였어도 놀라 일제히 날아오른다.
날갯짓 힘차게 창공 드높이 퍼져나가더니 이윽고 사라지는 갈매기떼...
큰길로 나와 조선 중종 때 축조됐다는 방어 성곽인 별방진에 이르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읍성 훼철령’에 따라 성곽들이 대부분 훼손되었는데 이를 문헌 고증에 따라 되쌓아 현재 제주도 기념물 제24호다.
<신동국여지승람> 제주목 관방조에 “별방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390자이고 높이는 7자이다.”라는 고증에 근거해 복원하였다.
지난해 왔을 적에는 메밀꽃이 소금 뿌린 듯 하얗게 흐드러졌었는데 이번엔 유채꽃 막 피어나기 시작했다.
보름 후쯤이면 기나긴 성곽 아래 노오란 유채꽃 아주 장관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