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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를 어디 두느냐에 따라

by 무량화 Feb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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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말라가지고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양호하구나.

전체적으로 가무스름하게 타기만 했지 야위긴커녕 생기 넘치는 얼굴로 입국하는 나를 보자 언니가 그랬다.

루르드에서 갖고 온 성수를 나눠주려 만나게 된 이들마다 내 나이를 알기에 한층 더 놀랍다는 반응들이었다.

시간여유만 된다면 사실 누구라도 시도할 수 있는 일로, 카미노에 나서는 건 남다른 각오보다 용기만 필요할 뿐이다.

실제로야 날마다 무거운 짐 지고 걷는 일이 쉬운 게 아니고 그렇다고 잠자리가 편한 것도 아니며 먹는 것 역시 변변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풍광 변하는 낯선 길을 내 의지대로 자유로이 걷는다는 건 여간 매력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 짙은 여운에서 채 빠져나오기도 전인 데다 주변의 자극에 고무받아서였던가.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하고 돌아온 사람마냥 한동안은 치기가 발동해 자못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아들 친구들이 모임에서, 한 달간에 이르는 나의  카미노 여정을 두고 무척 부러이 여기더라는 말을 얼마 전에 들었다.

대부분 경제여건이나 형편이 괜찮은 그들 부모들이지만 단체로 가는 해외여행조차도 맘대로 못 가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오십 대 자제를 둔 부모라면 일단 나이가 칠십에서 팔십대다.


그 연배에 이르니 건강이 여의치 않은 경우도 흔해, 장거리 여행 자체를 엄두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  

하긴 산티아고 걷는 건 약과고 히말라야를 등반한다든지 자전거로 대륙횡단하는 노익장들도 다.

그러나 아들 친구 부모들은 호텔에서 편안하게 쉬는 편이 좋고 해외라면 기껏해야 크루즈 여행 정도다.

나이 들면 거의 필수이다시피 한두 가지 꼭 챙겨가야 하는 성인병 약 아직은 복용하는 거 없다.

관절 지금까지는 별 문제없으니 수백 킬로에 달하는 장거리 마다하지 않고 걸어보겠다며 나설 수 있었던 .

그 점 자식들도 가장 기꺼이 여기는 부분이다.



누구라도 뭐든 자신이 스스로 즐겨서 진심 기분 좋게 하는 일이라면 힘든 줄 거의 모른다.

마음속 외침이나 갈망대로 자기 요구에 구순하게 따르는 일이라서 전혀 거슬림 없으니 좋을 수밖에.  

우리집 가장인 요셉은 한국 살 적부터 취미가 바다낚시였고 미국에서도 기회만 닿으면 바다낚시를 떠났다.

순수 취미 정도를 넘어 주말마다 눈비가 와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낚시에 중독돼 있었다.

그것도 흔한 갯바위 낚시가 아니라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서 한 이틀 죽을 고생하고 돌아와도 또 갔으니까.

망망대해 내리쬐는 땡볕 무지막지 뜨거워도, 물기 닿기만 해도 쩍쩍 달라붙는 엄동설한 뼛속까지 스미는 해풍도 마다하지 않았다.


바다에 홀린 듯 요셉은 제철 어종을 낚는 재미에 빠져 주말마다 바다로 갔다.

무엇보다도 새벽단잠 접어두고 한밤중에 일어나 낚시채비하노라면 어느 결에 새 기운 솟으며 신이 났다.

그렇게 심해에서 낚아온 싱싱한 생선이건만 당시 나는 회에 대한 선입견에 더해 날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입에 대지도 않았다.

잡식성이 된 요새 같으면 심해에서 은 자연산 만나기 어려워서 못 먹지만.



미국 와서 어쩌다 우연히 선택된(선택의 여지도 없었고) 세탁소 일에 잡혀서 십몇년을 꼼짝없이 옷먼지에 파묻혀 살았다.

아침 일곱 시 전에 출근하면 저녁 일곱 시 넘어야 퇴근, 그나마 일터 가까이 거처가 있는 덕에 피곤을  줄여줬다.

환기를 위해 앞뒷문을 늘상 열어두었기에 뉴저지 하늘을 자재로이 오가는 비행기나 바라볼 뿐 그야말로 여행이란 휴가 때 며칠간 잠시나 가능했다.

그런 생활상을 와서 보곤 기가 막힌 친정언니, 화살은 애꿎게도 한국에 있는 아들에게 돌아갔다.


가로 늦동생이 궂은일 하며 지내는 걸 보곤, 엉뚱하게 조카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닦달했으니 영문도 모르는 채 아들은 만판 곤욕을 치렀던 모양이다.  

당시 세탁소 일이라는 걸 난생처음 해보는 나였지만 주부라면 진작부터 한 일이라 별 문제없었기에, 영어도 형편없으면서 곧잘 적응해 나간 편이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짬도 없다는 말대로 워낙 바쁘다 보니 내가 어쩌다 이런 일을? 회의감에 젖어 우울해할 새도 별로 없었다.

울적해져서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지긴커녕 날마다 밝은 표정으로 드나드는 사람들과 즐겁게 교류하며 일터를 '놀일터' 삼아 하루하루 바쁘지만 활기차게 보냈으니 뒤돌아 회한 같은 건 없다.

중요한 은 그 일 속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발견하고 보람을 찾았기에 자기비하나 불평불만에 빠지지 않았던 거 같다.   



분명한 목표, 그것이야말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좌절하지 않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대학을 마치고 유학목적으로 미국에 같이 건너온 딸아이는 원하던 대학원의 '유물보존처리' 공부 대신 형편 따라 등록금이 낮은 한의대로 방향을 틀었다.

본래 고고학과 재학 중에도 중의학에 관심을 가져  우리는 96년에, 중국 북경과 천진으로 공부할 여건이 되는가 현지답사차 방문한 적이 있었더랬다.


중국유학 바람이 막 일기 시작하던 초창기, 당시 중국은 치안이나 주거환경이 매우 열악했기에 그 자리에서 계획은 접혔다.

미국에서 늦게나마 자기 길을 제대로 찾아 정진하는 딸에게 보내주는 교육비란 명목의 얼마간 자금을 만들게 해주는 내 고마운 일거리.


그러니 세탁소 일이 지겹다거나 힘들게 여겨질 리 만무였다.

비록 저녁이면 파김치 될 적이 많았지만 심적으로 자족하면 매사가 축복으로 다가온다.

물론 전적으로 도맡은 건 아니지만, 일부라도 내 노력으로 딸을 지원해 줄 수 있다는 게 흐뭇해서 외려 힘이 났기에 그 일을 내게 허락해 주심을 하늘에 감사드렸다.

애오라지 일용할 양식 얻기만을 위한 일이었다면 진작에 녹초 돼버렸을 테지만.


교민 누구나 그러하듯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에 종사하건 없던 기운도 새로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렇다. 내 삶을 이끄는 가치와 명분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기에 지치지 않고 일에 몰두하는 행복한 워커홀릭이 될 수 있었던 것.

어떤 일을 하며 보람과 긍지 나아가 자부심을 느낀다면 그 일 자체가 바로 심장 역동적으로 뛰게 하는 원동력 제공처다.

그렇게 정신없이 분주한 와중에도 글을 써 신문사에 보내고 블로그 운영 계속했으니 글은 또 하나의 내 버팀목이었고.



나름 의미 있었던 그 시절은 지나가고 나이 든 이제 '먼 길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것 같은 호젓한 시간과 마주하고 있는 요즘이다.

사에 예각 곧추세우지 않을 만큼 무덤덤해진 데다 긴장도 역시 느슨하니 헐거워져서 세사 별로 급할 것도 답답할 것도 없고, 부러운 것도 줄어든 지금.

허나 왜 그 먼 길 돌아온 이제 또다시 진짜 머나먼 길을 생고생하며 걸으려 했는데? 누군가 물으면 여전 답할 말이 궁해진다.

가급적 쓰기도 저어 되는 단어이긴 하지만 순례자다이 종교적 열망에 가득 차서도 아니고 사진찍기 좋아해서 맘에 드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긴 셀폰으로 기록사진이나 찍는 주제이니 어불성설)

색다른 이국 구경하러 가는 여행자나 별식 맛보러 가는 미식가도 있긴 한 모양이나, 산티아고 데 카미노의 애당초 취지는 그게 아니란 것쯤은 다들 안다.

조용히 혼자 걷는 시간이 많기에 자아찾기 또는 자기성찰, 이란 표현 곧잘 쓰는데 이에 이르면 괜히 오글거려지는 걸 어쩌랴.

하긴 내심 탐진치로 혼탁해진 영육 다스려 정갈하게 맑혀볼까도 싶었고 감히 가벼운 영혼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꿈 막연하나마 지향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었을 뿐.

글쎄? 어거지로 꿰어맞추자면 걷기 즐기는 사람 제멋에 취한 도락이었달까.


거두절미하고 한마디로 저 좋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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