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숲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를 했다.
눈발 휘날리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잣담길 걸으멍' 행사는 열 시 반부터 시작되는데 차를 잘못 타는 바람에 지각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낭패에 처한 순간, 천사 같은 의외의 조력자 덕분으로 치유의 숲 앞에 겨우겨우 닿을 수 있었다.
허둥지둥 뛰어올라가 우리 일행을 따라잡았다.
산림휴양 프로그램인 잣담길 걸으멍은 제주 고유의 산림목축문화를 경험해 보는 코스란다.
조선 초부터 국영 목마장의 경계에 소나 말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쌓은 돌담이 잣성 또는 잣담이다.
밭과 밭 사이의 경계를 짓는 밭담, 무덤가에 쌓은 돌담은 산담이듯이.
여전히 눈바람 찬 치유의 숲.
그래도 오길 잘 했다 싶은 건 특히 아기노루를 데리고 나온 노루 가족을 만나서였다.
잣담길 걸으며 스친 동백나무 군락지.
예전 할머니들 쪽진 머리 매초롬 빗질할 때 동백기름을 머릿단에 발라 참빗으로 쓸어줬다.
제주에서는 동백기름이 식용으로 사용됐다는데.
냄새도 적고 산패가 되지 않는 최상의 기름이라 혼인 음식을 만들 때는 꼭 동백기름을 썼다고 한다.
요샌 올리브유와 똑같이 올레인산이 함유된 동백기름을 피부 보습제로, 천식 치료제로 개발하는 중이라고.
위미리나 신흥리에는 동백기름 방앗간이 있을 정도로 제주섬에서는 동백 씨가 흔했고 중하게 여겼다는데.
치유의 숲 동백나무 군락지에도 한때 많은 동백 씨가 떨어져 저 혼자 싹을 틔웠던가 보다.
그렇다 보니 마구 싹튼 동백낭, 빼빼 마른 채 저마다 키다리 되었다.
하도 조밀하게 돋아나 작은 키로는 광합성을 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서로 키재기 하며 한줄기 햇빛 바라 위로만 향하다 보니 저마다 여리여리 가녀리다.
높직이 핀 붉은 꽃 몇 송이, 이젠 동박새 부르기엔 역부족일 듯.
또 한 곳 조록나무 군락지가 이웃해 있다.
제주 와서 첨으로 만난 상록수다.
이파리는 윤기 나는 동백잎과 똑 닮았다.
그러나 연회색 동백 줄기와 달리 조록나무 줄기는 적갈색이다.
조록나무는 목질이 쇠처럼 강하다고 한다.
해서 집을 지을 때 기둥으로 썼으며 호미나 낫 등 농기구의 자루로 쓰였다 하니.
잣담에서 나무를 관찰하며 듣는 나무공부도 즐겁다.
외관이 거의 엇비슷한 삼나무와 편백나무 구별법도
다시 익힌다.
피톤치드 발산량이 나무 가운데 최고치라 삼나무 줄기에 끼는 이끼가 편백줄기에는 생기지 않는다 등등.
아주 커다란 숨골도 길목에서 만났다.
대나무 숲에 바람이 지날 적마다 댓잎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서걱댔다.
주변에 대나무 무성하면 집이 있었던 자리라고 해설사가 말했다.
요즘에는 플라스틱으로 대체됐지만 그땐 집집마다 대나무를 심어 살림에 필요한 차롱이나 구덕 같은 대바구니를 엮거나 대조리도 만들고 시렁으로도 쓰였다고.
추녀에서 떨어지는 낙숫물로 땅이 패이는 걸 방지하고자 제주 토종식물인 양하를 심어 나물로 썼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호근마을이 깃들었던 옛터라더니 올레를 둔 집 앞 골목길과 계단식 밭자리도 보였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유적지 같은 돗통시도 만났다.
발판 구조 선연한 이끼 낀 돌무더기와 움푹 파인 돼지우리를 찬찬히 모두 들여다봤다.
오고생이 숲에 들자 오다 말다 하던 눈발이 갑자기 푸짐해지더니 함박눈되어 쏟아졌다.
이월도 후반인 오늘, 하긴 제주에는 삼월에도 눈이 펄펄 날리니까.
오고생이숲의 명물인 옆으로 누운 삼나무.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칠 형제 삼나무를 통해
각자 삶의 의지를 새삼 다잡아보기도....
판근만 해도 그렇다.
나무는 하늘 향해 키를 키워가는 한편 뿌리는 깊은 지심으로 촉수를 뻗어나간다.
하지만 온데 돌이 무수한 제주다.
화산으로 생겨난 제주의 땅속에는 단단한 암반이 깔려있다.
열악한 환경 탓하지 않고 나무는 장애물인 바윗장을 감싸서 아예 제쳐내기도 한다.
뿌리를 지상으로 올려 굵직하게 벋기도 한다.
그게 판근이다.
연약한 식물이 무겁고 견고한 바위와 공생공존하는
현장은 문득 우릴 숙연하게 만든다.
살면서 만나는 크고 작은 실패나 장벽 앞에 우리가 맥없이 주저앉을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