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위치상 지정학적 요충지이기에 그만큼 주변국들이 들개처럼 군침 흘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이라는 거대 강국에 둘러싸인 형국, 지난 역사 통해 수차 국권 침탈을 당한 사례가 목도된다. 우리가 약해지거나 허점 보였다 하면 그들 중 누군가가 가차 없이 달겨들어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조공을 바치며 무릎 꿇은 삼전도의 수모만이 아니라 아예 남의 나라 식민지로 전락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무참히 능욕을 당하고 만 한반도 전역.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 하며 온몸으로 저항한다. 의식있는 선대들은 죽음 불사하며 일본에 항거했다. 그 흔적들이 전 강토 어디랄 거 없이 핏빛으로 스며들어있다.
제주라고 예외는 아닐 터, 아니 오히려 변방지역이라 일제로부터 온갖 곤욕과 고초를 더 겪을 수밖에 없는 땅이었다. 탈 경계선상인 두만강 이북인 북방의 연해주가 그러했듯 남녘 바다 가장 앞에 나서서 모진 풍파 전신으로 맞부딪쳐야 했으니. 제주 항일정신의 맥을 한눈으로 짚어볼 수 있는 제주항일기념관을 찾았다. 조천만세동산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돼, 제주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보존·전시하고 있는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제주 3대 항일운동인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등 제주의 항일운동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전시된 기념관. 일제 침탈의 기록물과 벽면 부조, 설명패널, 기록화, 영상모니터, 매직비전, 종합그래픽, 복제 모형 등이 체계적으로 전시돼 있었다. 그곳 전시물 중, 항일투쟁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어도 전해 받을 포상자가 없어 기념관에 보관된 훈장을 보자 심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대가 끊긴 저간의 사연 미루어 짐작이 되기에. 항일운동을 상징하는 3·1 운동 기념탑과 조형물이 둘러선 공원은 잔디 고르게 깔린 매우 넓은 부지였다. 관광지인 제주라 외지인의 방문자는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만 그래도 너무나 휑하게 빈 공간이라 아쉬운 감이 들었다.
독립투사와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날인 삼일절, 오전에 정부의 3·1절 기념식이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곤 했는데 이번은 글쎄다.
서울 도심을 비롯 전국 곳곳에서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며 나라를 사랑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흔드는 태극기 물결. 저마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로 나온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작금의 사태를 촉발시킨 자 누구인가. 심히 유감스럽고 개탄스럽게도 쌍방 간에 서로 네 탓이라며 삿대질해 대는 난맥상을 우리 국민은 언제까지 봐야 하나.
정부를 성토하며 "탄핵!"을 목청껏 외치는 군중들과 비상계엄을 엄호하는 상반된 대치국면이 어서 속히 종식되고 안정 되찾게 되기를. 정권이 바뀐 지 불과 삼 년도 안돼 다시금 우리는 대한민국 대통령 된 자의 비극적 말로를 목격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국민이 국가를 걱정해야 하는 정국임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마음으로 조국의 독립만세를 외쳤던 백여 년 전 그날의 순백함처럼 과연 순절한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을까. 언제쯤이나 우리는 갈등 극복하고 화합해 하나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은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누구나 읽었을 소설이다.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깡마른 채 여윈 노인, 팔십도 넘은 가난한 어부 산티아고는 허기진 채로 바다로 나가나 내내 허탕만 친다. 낚시 운이 다한 듯 노인은 번번 빈 배를 끌고 돌아와 오두막에 늙은 몸을 부렸다. 무력하게 보이는 노인이지만 바다색을 닮은 눈빛만은 투지와 불굴의 의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산티아고 노인은 근 석 달이 되도록 물고기를 낚지 못했으나 포기하지 않는다. 85일째 되는 새벽, 동트기 전에 그는 역시 바다로 나간다. 작살과 갈고리를 챙겨 다시 바다로 향하는 그. 노인은 외통수에 걸린 바보였던가. 먹을 거라곤 물 한 병뿐이었다. 그럼에도 조류를 따라 먼바다로 계속 나아갔다. 엄청난 청새치가 걸려들었다. 이틀 동안을 청새치에 끌려가면서도 필사적으로 버티는 노인. 가망 없는 상황 같다가도 좋은 징조가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하느님, 물고기가 제발 뛰어오르게 하소서. 제게는 아직 녀석을 다룰 수 있는 줄이 충분히 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단 혼자, 청새치에 끌려다니던 그는 드디어 물고기의 몸속에 작살을 깊이 꽂았다. 침착하고도 강인했던 은빛 물고기가 허연 배를 드러낸 채 마침내 떠올랐다. 머리를 흔들어 지쳐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그는 올가미와 밧줄을 챙겼다. 싸움은 끝났다. 청새치를 뱃전에 비끌어 매달고는 험난한 대양을 며칠 노 저어 돌아온다.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배보다 더 큰 청새치를 끌고 오는 도중. 사투는 여기서 또다시 벌어지게 된다. 정신 아찔하도록 엄청난 상어가 눈앞에 나타난다. 신선한 피 냄새를 맡은 회색 상어는 몸길이가 1미터도 넘는다. 빠르게 헤엄쳐 오는 상어 떼를 바라보며 앞으로는 주기도문을 잘 외우겠다고 그는 하느님께 흥정도 한다.
청새치는 처한 고난과 역경을 상징한다. 매달고 온 청새치가 상어에게 번갈아 공격당해 살이 다 뜯겨 뼈와 대가리만 앙상히 남겨질지라도 그는 몽둥이로 힘껏 상어를 내리치면서 묵묵히 배를 몬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건 아니다. 불의일지라도 받아들이고 어쩔 수 없었다며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적응해 살아간다. 비루하게 어떻게든 뒤로 물러선 비겁함에 당위성을 부여해 버린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게 무언가. 죽을 때까지 싸울 거야, 노인이 말했듯 인간은 파멸당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 존재다. 승산 없는 게임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는 결과물을 받아들여야 할지라도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최선만은 다해야 한다. 헤밍웨이는 현실참여적인 작가다. 만일 정의와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다 해도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불굴의 의지가 있는 한 패배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 돛대처럼 내건 헤밍웨이다. 어떤 조건에서 건 열심히 살아내는 인간 군상들의 면면에 천착한 그다. 싸워야 할 의미 있는 명분이 분명하다면 어떤 시련이 닥칠지라도 인간은 결코 쓰러질 수 없다.
조선 시대 백성의 70%는 하층민이었다. 조선조 선조는 임진왜란 내내 중국으로 망명할 묘안만 생각했다. 구한말 고종은 한성판윤 자리를 2주에 한 번씩 갈아치워 가며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당파싸움에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조선이었다. 조선 망국 무렵 '서쪽에 의지하고 동쪽에 요청하며 오로지 타국에 아부' 했던 관리만이 아니라 민중은 한심할 정도로 무기력하고 쇠약하고 무지했다. 조선 주권을 일본에 넘기는 한일합방 포고문을 내걸면 격렬히 저항하며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일본은 심히 우려했다. 하지만 그 어떤 항거나 반란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고 '조선 사정'이란 책에 마사이치는 기록했다.
당시 윤치호가 피를 토하듯 써 내린 상소문은 이러하다. "충실하고 어진 사람들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니 아첨하는 무리들이 염치없이 조정에 가득 찼고, 상하가 잇속만을 추구하니 가렴주구 하는 무리들이 만족할 줄을 모른 채 고을에 널렸습니다... 중략... 하나로 일치된 충성심과 애국심은 어두운 거리에 빛나는 해나 별과 같고 홍수에 버티는 돌기둥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한일 협약 체결 당시 강박(強迫)에 의한 조약이었으므로 고종은 그 조약이 불법이고 무효인 점을 밝히기 위해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기도 했다고 배웠는데.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라며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민영환도 있었다는데. 한일합방 체결에 참정대신 한규설이 통곡했다는데, 을사조약의 무효를 상소하다 제지당한 조병세는 자결했다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사실에 근거한 팩트이고 진실로 옳은 건 무엇이란 말인가. 포장된 국사 교육으로 을사늑약 당시 협력 대신이었던 매국노 을사오적만 달달 외웠더란 말인가. 수많은 의병들과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안중근의사와 유관순 열사만 삼일절마다 앵무새처럼 찾곤 했더란 말인가. 오늘날 그렇더라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도 저항하지 않고 침묵한다면, 아무 힘이 없다며 그저 순응이나 한다면? 흔히 역사에서 배우라고 한다. 역사에서 교훈을 구하라고도 했다. 한나라가 무너지는 일, 패망의 순간은 야금야금 곪아가던 암이 어느 날 느닷없이 터져 시한부 판정이 나듯 그렇게 온다. 자식들이 손주들이 자유로운 민주 사회는커녕 제 나라도 없이 억압의 굴레를 짊어지게 되고 만다면?
“Be calm and strong”이란 글귀는 바로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온다. 먼바다로 낚시에 나선 노인은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큰 청새치와 며칠간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게 된다. 그때 끊임없이 자신을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중얼거린 대사의 일부인 Be calm and strong이다. 그는 마침내 거대한 청새치에게 작살을 깊이 꽂았다. 우리 모두가 기다리는 침착하고도 강한 그 사람! 그가 등장하면 우리는 성심 모아 '낡은 담요를 덮고 잠든 노인을 위해 빈속으로 바다에 나가지 않게 하려고 저녁을 가져온' 어부 소년이 되어야 한다. 산티아고를 진정으로 격려하고 성원해 주는 그 소년이 되어야 한다. 사흘 만에 바다에서 돌아와 깊이 잠든 노인의 상처진 손을 보고 엉엉 운 소년, 잠에서 깨어난 노인에게 커피를 쥐어드리며 따뜻한 말벗이 되는 우리여야 한다. 부디 신뢰할만한 구원 투수가 나와 혼돈에 빠진 이 민족에게 놀라운 축복이 임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