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등성이 겨자색으로 물오르는 3월.
비가 내릴 듯 하늘은 흐렸다.
선열들의 희생을 기리고자 찾은 곳, 서대문 독립공원.
사적 제32호인 독립문을 비롯해 옥사와 사형장, 망루 등을 원형 그대로 복원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건물이 언덕 위로 보였다.
이 나라는 선열들이 '목숨' 바쳐 독립투쟁하므로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났고 어르신들이 '몸' 바쳐 경제부흥 이룩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이 시대 젊은이들은 그분들이 고귀한 희생정신으로 피땀 흘려 일궈놓은 풍요로운 이 땅에서 별 어려움 겪지 않고 살아가다 보니 소비생활 과하게 즐기는 건 아닐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진 옥고를 치르다가 마침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서대문형무소 자리는 생생한 역사의 흔적이자 거울이다.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뼈아픈 과거를 제대로 되돌아보고 오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리라.
<추모비: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민족의 혼 그릇을 형상화>
<고향인 충남 당진군 대호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외조부 항렬인 相 자 어른께서 손수 짠 명주 천에 수를 놓아 만든 태극기>
<여 옥사 8호 감옥에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 신관빈, 김향화, 심명철, 임영애, 권애라 여사 등이 삼일운동 1주년을 맞아 독립만세를 외치며 옥중 투쟁을 전개했다 >
<좌는 조선총독부가 펴낸 소책자로 중일전쟁 승리를 위해 조선 여성들도 적극 동참하라는 내용/
우는 경성여자사범학교에서 사용된 교재인데 국문법의 초급 단계 정도 수준 >
<벽을 통해 서로 수신호를 주고받는 뼈 앙상한 모습의 독립투사>
<처형된 시신을 빼내던 시구문을 바라보는 나어린 후대들은 그저 경건하게..>
눈 오는 밤(雪夜)
감옥 둘레 사방으로 눈이 펑펑 내리는 밤(四山圍獄雪如海)
무쇠처럼 찬 이불속에서 재와 같은 꿈을 꾸네(衾寒如鐵夢如灰)
철창의 쇠사슬 풀릴 기미 보이지 않네(鐵槍猶有鎖不得)
심야에 어디에서 종소리는 자꾸 들려오는지(夜聞鐵聲何處來)
시 <설야>는 33인 중 한 분인 만해 한용운 선생께서 3년 동안 이곳에 수감되어 있을 당시 옥중에서 썼다고 한다.
형무소란 곳은 죄인들을 가두는 데나 서대문형무소는 특히, 자주독립을 위한 불굴의 의지로 목숨 바쳐 나라를 사랑한 애국지사들이
온갖 고초를 당한 끝에 사형장으로 끌려간 비극의 현장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긴 일제 강점기에 민족독립운동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거세게 일어났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선 통감부는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수많은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체포하여 1908년에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이 형무소에 투옥시켰다.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대한제국시대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건립한 독립문 옆에다 지은 경성감옥은 근대식 감옥의 시작인 셈으로 가즈마라는 일본인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규모는 500여 명의 기결수(旣決囚)를 수용할 수 있는 560여 평의 목조건물이었다.
서대문 형무소의 옥사와 격벽장은 한국에서 흔한 구조가 아닌 파놉티콘 구조로 설계된 형무소다.
파놉티콘 구조는 부채꼴 형태라 중심에 위치한 감시자들은 외곽에 있는 피감시자들을 감시할 수 있으나, 감시자들이 자리한 중심은 어둡게 되어 있어 피감시자는 감시자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구조다.
재와 같은 꿈을 꿀 수밖에 없는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자주독립을 향한 희망의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던 분들.
그렇게 김좌진장군, 손병희선생, 열사 유관순, 의사 안중근, 이봉창, 강우규 등 3,000명의 조선인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시기는 민족의 자존심이 무참히 훼손당한 암흑기였고 절망과 고통의 시기였다.
하지만 현실에 굴복하거나 타협지 않고 민족 독립을 향한 투쟁을 이어갔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
일제 때 이곳은 10년 이상이나 무기형(無期刑)을 언도받은 전국의 기결수들이 수감 또는 이감되었다 는데,
여느 감옥과는 달리 18세 미만의 소녀수(少女囚)들을 수감하고 있었던 까닭에 유관순 열사도 천안에서 구금됐다가 서대문으로 이송돼 와 여기서 옥사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투옥되었던 이곳.
당시 이 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만 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그처럼 사형 선고를 받은 전국의 애국지사들이 이감 후 혹독한 고문 끝에 생을 마감한 장소이기도 하다.
해방 뒤에도 교도소, 구치소로 활용되다가 1987년 교도소 시설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갔다.
그 후 기존의 건물을 보수해 옛 모습대로 복원한 후 국민정신교육을 위한 박물관, 문화재 형식의 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신 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에는
자료에 의해 고증된 분들의 이름이 금속판에 새겨져 있었다.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1923년에 설치한 높다란 망루가 선 바깥 정경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하나같이 살풍경한 모습이라 더더욱 움추러들게 만들었다.
몸을 뒤척이기도 어려울 만큼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인 0,7평의 독방은 빛 한오라기 들어오지 않았다,
사형집행 도구인 올가미, 고문 기구 등은
인간이 인간에게 그것도 피지배 민족에게 가한 잔학 무도함의 극치라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나무의자 위로 늘어진 올가미에 목을 걸어 사형이 집행되면 시신은 지하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구조를 보자 슬그머니 목덜미 어루만져졌다.
그다음 과정은 사형장에서 곧바로 통하게 만들어진 시구문 토굴 통해 처형된 시신을 한밤중에 빼갔다고 한다.
민족의 아픈 역사를 직접 체감해 볼 수 있는 장소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불행했던 과거의 비극을 되새겨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준비하라는 산교육장에 다름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에 붙잡고 통곡했다는 사형장 입구 왼쪽에 자리한 미루나무>
<이 길을 똑바로 걸어오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면 형장, 왼쪽으로 틀면 면회실이 된다는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아이들이 생과 사의 깊은 의미는 파악지 못한다 해도 자못 표정들 엄숙하고 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