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파피는 다 어디로 갔을까.
지난해, 3월 초부터 오렌지 칼라로 온 들판에 점묘화를 그렸던 파피가 올핸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
예년을 기준 삼아 삼월 들어서자마자 수차례 수로 아래 들녘에 나가봤지만 파피 흔적은 찾을 길 없었다.
어쩌면 그리도 깜쪽같이 모두 사라져 버렸을까.
마치 그때 그 순간의 파피 축제가 한바탕 봄꿈이거나 신비로운 환몽도 같고 환상만 같았다.
흐린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행여나 싶어 지난주 요셉을 재촉해 들로 나갔으나 허사였다.
한두 송이 파피가 봉오리 진 채 바람에 나부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조바심치며 주중에도 찾았지만 여전히 파피는 감감무소식,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거의 한 달여, 지난해 봄 벌겋게 불붙어 들불 번지듯 화려한 춤사위를 펼치던 파피꽃의 향연은 이제 거기서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수로 아랫녘을 포기하고 그래, 못 먹어도 고다!
이번엔 파피 리저브로 방향을 틀었다.
몇 년 들어 계속 파피군락지 이동이 심해 리저브에서는 보기 힘들어진 파피라 작년에도 리저브 건너편 언덕에서 겨우 해후한 터였다.
애비뉴 K에서 에비뉴 I로 접어들어 들길을 달리는 동안 군데군데 무리 지어 핀 노란 들꽃무리가 손짓했다.
황량한 민둥산으로 서있는 파피 리저브를 지나쳐 곧장 서쪽으로 향하다 보니 길옆으로 파피꽃이 듬성듬성 보였다.
날씨는 화창하나 바람이 엄청 심해 파피는 거지반 꽃잎을 오므린 채였다.
간밤 비가 온 덕에 들녘은 생기로웠고 덤불링트리마저도 싱싱한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지금 한창 파피철이련만 가는 곳마다 어디나 꽃흉년이 들었다.
파피가 피었다 해도 들 전체에 주황물감을 퍼부은 듯 흐드러졌던 진풍경은 접할 수 없었다.
파피 평원을 처음 접한다면 저나마로도 흔감하겠으나 다른 해의 놀라운 감동을 떠올린다면 이 정도는 허술하기 짝이 없어 저으기 실망스러웠다.
엘리뇨 현상을 들먹이며 비가 많을 것이라 예보했지만 한두 번 내린 폭우 외엔 빗줄기도 감질났다.
건조하고 황막한 모하비 사막이 봄 한철 반짝 활기를 띄울 수 있는 건 겨울철 강우량 덕분이다.
사막식물들은 이때 저장시킨 물로 얼른 싹을 틔워 키 돋운 다음 생애 최고의 꽃축제를 펼칠 수 있는 것.
척박한 땅에 사는 야생화들은 주변 환경이 꽃을 피울 조건이 안되면 계속 씨로 남아 해를 넘긴다고 한다.
파피는 강우량이 풍부한 해에는 들판을 가득 메우나 비가 적게 온 해에는 기근에 대비, 꽃을 피우지 않는다.
환경 여건에 맞춰 그저 생존만 하고 보려는 사막식물의 본능적 체질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래저래 올해 파피는 여태껏 본 중에서 가장 빈약했다.
능선이 California Poppy Reserve 구역이나 파피 한 송이 피지 않은 민둥 언덕이다.
파피만이 아니라 여타 야생화도 별로 자생하지 않는 듯 하니 굳이 찾아가 바람맞지 마시길.
삼월 내내 기다리고 기다려도 파피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겨울 우기 알맞은 시기에 비가 내리지 않아 파피 싹이 제때 발아하지 못한 연유로 올해 파피 구경은 아무래도 어려울 거라는 전망대로였다.
몇 차례 봄비가 내린 다음, 행여나 하며 캘리포니아 파피 리저브를 수차례 찾았으나 번번 헛걸음만 쳤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어제 오후 파피 보호구역으로 향하면서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예년 같으면 들녘에 들어서기만 해도 길섶 따라 파피 꽃송이가 환한 오렌지빛으로 반겼건만.
그 정도쯤 달려와도 저 멀리 능선으로 들불 번지듯 벌겋게 화염이 타올랐을 텐데 무표정할 뿐인 주변.
리저브에 도착했지만 파피는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한두 송이 초라하게 피어난 게 고작이었다,
해마다 질펀하게 깔렸던 주황빛은 전혀 찾을 길 없었다.
파피 철이건만 무채색으로 텅 비어있는 파피 리저브,
인적 끊긴 벌판엔 들풀만 바람에 나부낄 따름이다.
허탕치고 그냥 떠나려니 아쉽고 미진해 망연히 서서 사방을 둘러보는데 건너편 산자락 군데군데 황토 반죽을 부어놓은 것 같은 낯선 풍경이 시선에 들어왔다.
선연한 주황빛이 아니기에 파피라 여겨지진 않았지만 기왕 나선 걸음, 그쪽으로 차를 돌렸다.
리저브 바로 맞은편 사냥터 입구의 비포장도로로 들어서 잠시 달리자 좌우로 파피 무리가 키 낮은 야생화 위로 오연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 너희들 피어있었구나~ 예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반가움에 가슴이 다 울렁거렸다.
봄의 진객이 언덕 전체를 덮고 있었지만 전처럼 빈틈없이 좌악 깔린 게 아니라 듬성듬성,
그 대신 파피 포기마다 한 아름은 될 만큼 소담스러웠으며 실팍진 대궁에 꽃송이는 어느 해보다 훨씬 탐졌다.
그 너른 들판에 촬영을 나온 두 팀 외에는 호젓하니 아무도 없었다.
남미계 모델이 마침 우리가 앉아있는 바로 앞에서 화보 촬영을 하기에 사진 찍어도 괜찮아? 묻자
흔쾌히 오케이 하면서 고맙게도 포즈까지 취해줬다.
파피 밭에 강림한 도도한 여신 같은 그녀는 프로답게 잠깐 동안에 여러 표정을 연출해 주었다.
오랫동안 연마하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깊은 내공 돋보이는 경지, 프로는 역시 프로였다.
그녀와의 만남은 우연 같지만 이미 예비되어 있었기에 올 파피를 그리도 기다렸던가도 싶고
몇 번씩이나 여기저기로 안타까이 파피 찾아 헤맸던지도 모를 일이다 여겨졌다.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로 화려한 외출이 된 올봄 파피 나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