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곧 사람이다'란 말이 있다. 모든 글에 해당되지만 수필에서는 특히나 그러하다. 삶과 연계된 인격이 글 속에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글쓴이의 사는 모습은 물론 인간미, 인생관 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해서 몇 편의 글을 읽고 나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게 된다. 그만큼 참모습 그대로의 진실에 기초하며 그것을 생명으로 한다. 하다못해 시답잖은 잡문이나 콩트일지라도 거기에서 글쓴이의 인성과 가치관 등이 읽힌다.
자신의 이야기도 주인공 하나 내세워 슬쩍 대입시킨 뒤 시치미 떼고 나앉을 수 있는 소설과는 속성부터 판이한 수필은 결국 자기 고백이며 자기 표백. 자신의 내면세계까지도 가감 없이 투영시키는 작업, 그래서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반쯤 가린 주렴도 없이 적나라한 노출일진대 아무런 망설임이나 저항감조차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어쩔 수 없는 미완의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스스로 부족하고 모자란 자신을 여러 사람 앞에 내 보인다는데 이르러선 어찌 주저치 않을 수 있겠는가.
수필은 정직하여 거짓이나 가식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의 면면을 올곧게 비추는 명경대가 되는 것이 바로 수필이다. 글을 쓸 때만큼은 자신을 곧이곧대로 나타내게 되니 결국은 가장 자기 다운 면모를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작업이 수필 쓰기다. 이처럼 <글은 사람이다>란 명제가 어느 장르보다 적절히 들어맞는 셈이다.
간혹 글과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접한다. 분위기든 색깔이든 이미지가 각각 서로 다를 때 당혹감과 아울러 어쩐지 사기당한 기분까지 든다. 그만큼 수필은 글쓴이의 면모가 솔직 담백하게 반영된 글이라 인식된 까닭이다. 내용을 액면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말하자면 이를 데 없이 투명한 유리그릇과 같달까. 따라서 수필을 통해 자연스럽게 각자 삶의 안자락은 물론 일상사를 넘겨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의 공통점은 수필가 다수가 학자 또는 전문직 종사자라는 것. 아니면 주부라도 하나같이 재주가 남다르고 능력도 다양하다는 공통분모가 발견된다. 서도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나름대로 일가를 이룬 이가 의외로 많다. 수석과 난, 분재 중에 즐기는 취미가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반면 나는 인품이나 생활상이나 두루 지극히 비수필적이다. 몰취미하고 무엇 하나도 잘하는 게 없다. 겸사가 아니라 도무지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다. 살림을 규모 있게 운용해 재산 늘려놓은 바 없고 살가운 아내와 엄마 역할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닐뿐더러 효행이 남달리 두텁지도 못하다. 주부로서 응당 잘해야 할 음식 솜씨도 보통 이하다. 게다가 히스테리칼한 성격에 자존감만 별나 고집이 세다. 그렇다고 명문가 출신도 못 되며 공부를 특출나게 잘한 것도 아니고 운동은 아예 평균치에조차 못 미친다. 노래든 흥이든 시원찮아 노는데 어울리지도 못할 정도의 수준이고 말 주변이 좋은 것도 아니며 재치나 센스가 뛰어난 건 더더구나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노력이나 했던가. 한 가지라도 제대로 갈고닦아 성취시킨 바가 있던가. 아니다. 붓글씨는 길 영(永) 자 쓰는 도중 진력 내 버렸고 꽃꽂이는 일 년을 채 못 채우고 외면해 버렸다. 수석에 몰두하고 난을 기르고 다도에 심취하고 사군자 치는 고아한 아취는 내 몫이 아니었다. 참 딱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대책 없는 한심한 사람도 같다. 그 상태로 어쩌자고 글에 매달렸었는지 어이없기도 하다.
좋은 수필을 쓰자면 우선 수필적 경지를 쌓으라 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그만 목이 움츠러들며 글로부터 놓여나고 싶어 진다. 좋은 글쓰기는 글렀으니 유치한 자연예찬이나 늘어놓고 잡문 따위나 쓰며 자족해야 할 것인가, 참담해진다. 한편, 진실한 생활이 좋은 글을 낳는다는 구절에 이르러 솔깃해진다. 대체로 주어진 현실과 여건에 충실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놓인 그 자리에서 불평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생활인인 것이다. 우아한 목련화가 아니라도 괜찮다. 내 몫으로 주어진 조그만 풀꽃을 사랑하며 일상의 자잔한 기쁨들에 감사할 줄 안다면 사실 행복이란 별것이던가. 나는 키 낮은 시정인의 하나로 누항사에 깊이 파묻혀 그저 그냥 익명으로 그렇게 살고자 한다.
글을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장식 달고 거창하게 시작한 것이 아니었듯 그저 단지 좋아서 쓸 따름이다. 좋아서 하는 일에 각고의 아픔이니 내출혈이 따를 리 없다. 문학정신의 결여를 탓해도 별반 개의치 않으며 덩더꿍 제 신명에 겨워 돌아가는 춤사위에 취해 쓰는 글. 그러나 적어도 단순한 도취요, 괜한 흥분만은 아니다. 무언가 써야 될 이유,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므로. 그 열정의 핵을 나는 하늘의 선물이라 부른다. 나아가 나는 이미 발표한 글에 깊이 집착하지 않는다. 글을 수용하는 것은 독자의 관할이고 비판도 감동도 그들의 몫. 나는 단지 내 나름 지고의 선을 추구하고자 할 따름이다.
또 하나, 고통 끝에 피는 꽃이 아무리 찬연하더라도 나는 그런 영광은 사양하련다. 좋은 글로 큰 빛 되고자 처절히 아파보고 싶지도 않다. 여우의 신 포도 격일지 모르나 명성 얻어 떠들썩 해진들 더 높아질 욕망의 사다리 타기도 피곤한 일. 하물며 글로 이름 석자 후대에 남긴다는 것은 또 얼마나 부질없는가. 그때 그 이름이 지금의 나와 무슨 상관이며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다만 제 이름에 때는 묻히지 말 일이다. 무엇보다 내 그릇됨을 스스로 알거늘, 대가의 자질과 역량은 애당초 타고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저 언제나 나 자신과 매 순간에 성실할 수 있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것이 있을까 싶잖다. 생각해 보면 그 때문에 글을 써 온 것은 아니던가.
글쓰기는 자기 정리다. 자기 정화다.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는 작업이고 흐려진 심안을 맑히는 작업이다. 또한 글은 한편의 참회기도이자 성찰일기이다. 때로는 추억을 반추하는 시간도 되고 감정의 분출구 역할도 한다. 그렇듯 글은 내게 있어 언제나 '열린 창'인 셈이다. 전에도 썼지만 나의 글이 감히 난이길 바라지 않았다. 학이 길 원하지도 않는다. 수수한 이웃, 무간한 친구로 족하며 나아가 무엇에도 구애됨 없는 마냥 자유로운 마음의 산책으로 충분하다. 나의 글은 청자도 아니고 백자도 아닌 분청이길 바란다. 태 고운 청자나 백자보다는 쓰윽 휘두른 귀얄 무늬 하나로도 멋스러운 풍류 간직한 분청이 되어 매화 저절로 꽃 피어나는 그런 경지를 터득하고 싶을 뿐.
민망스러운 얘기지만 그러나 나는 뚜렷한 수필론이 정립된 바도 아니고 수필관이 확고한 것도 아니다. 더욱이 지성이 받침 된 인격체 운운하면 숨어버리고 싶어 진다. 이론도 약하다. 다만 쓰고 싶다는 욕구가 늘 충일하다. 그득 차서 넘치는데야 쓰지 않고는 못 견딜 노릇 아닌가. 그러나 다작(多作)은, 글의 남발은 분명 자랑거리가 못된다. 한편 한편에 신중을 기하고 퇴고를 거듭하여 조심스럽게 발표하기보다 설익고 여과되지 않은 채로 마구잡이 방류하는 식은 지양되어야 함에도 나는 늘 그러하였다. 올해는 작정하고 글을 적게 쓸 참이다. 아니 쓰긴 쓰되 발표는 되도록 삼갈 생각이다. 이제야 좀 철이 드는 것인지....
도처에 무수히 숨어있는 글의 소재들이 눈짓을 보낸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 무궁무진한 재료들. 매일 색다른 감동 없이 마주한 사람들과 자연 그리고 도시가 어느 날 뜻밖의 느낌으로 다가설 적이 있다. 또한 별스럽지 않은 일상사에서 참신한 글감을 만나기로 한다. 평범 속에 묻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내가 거두어 주는 기꺼움을 위하여 나는 즐겨 길에 서는지도 모른다.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