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가을 나는 한때 황홀하게 불타올랐다.
잎잎이 눈부신 빛의 잔치는 성대하고도 아름다웠다.
생의 정점이었다.
물론 성장통처럼 치른 잠깐의 신록도 빛나는 환희로 기억되고 있다.
성하의 농밀한 녹음도 과분한 축복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가을을 맞으며 어느 시인의 싯귀처럼 삶의 이유였던 것, 삶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렸다.
집착의 끈을 아쉽지만 놓아버렸다.
애착의 정을 애석하나마 비워버렸다.
그렇게 지나온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렸다.
꿈, 소망, 추억, 사랑 같은 감미로운 단어들도 함께.
앞으로의 여정에는 단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최대한 가볍게, 철저히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리지 않고는, 사방에 빙하 떠다니는 겨울의 해협을 건널 수 없을 것이므로.
낙엽 져 발치에 뒹구는 지체들이 바람에 흩날려 이리저리 흩어지더니 이윽고 흙으로 돌아갔다.
혹독한 겨울이 들어섰다.
영하의 눈바람이 내내 몰아쳤다.
맨몸으로 삭풍을 견뎌야 했다.
달리 보호막이나 피신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뾰쪽한 돌파구도 없었다.
뼈골 시린 냉기 속에서 헐벗은 채로 고문당하듯 겨울 한복판에 서있었다.
아리다 못해 따갑게 매서운 추위였다.
끝마디부터 얼얼해지더니 차츰 감각점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까무룩 잠이 들 것만 같았다.
그래 더 세게, 가차 없이 더 모질게 연단하려무나.
새디스트처럼 고통은 의외로 달콤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것 같았다.
환한 빛살이 이끄는 것 같았다.
나른하니 맥이 풀렸다.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어딘가로 가뭇없이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아, 모든 것으로부터 놓여나는구나.
자유로워지는구나.
그것은 어둠의 유혹이었다.
안개 깊은 저 건너, 저 건너는 피안이었을까.
갈등 고통 모순 아픔 그 모든 어려움이 없다는?
본능적으로 사리게 되는 것들로부터 나는 비겁하게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마지막 코너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노려보듯, 정 그렇다면 무리수를 둘 밖에.
입은 앙 다문 채였다.
사악한 오기와 교만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딴에는 전부를 내주었다고 여긴 그 가을이다.
더 이상의 포기, 더 완전하고도 철저한 포기를 원한다는 것이겠지.
번제물이 부족하다는 것이겠지.
좋아, 나를 송두리째 불살라 흩날려버리마.
주먹 쥔 손을 스르르 펴려는 찰나, 무언가가 마구 흔들어댔다.
정신없이 뒤흔들리자 전신이 따라서 요동질 쳤다.
우듬지에서 밑둥치까지 격렬하게.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혼곤히 빠져들던 수마로부터 그렇게 놓여났다.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은 바람이었다.
바람이 수시로 가지를 흔드는 이유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절망의 끝까지 걷게 하여 고통의 불로 정련시키지 않고는 구제할 길 없는 불순물 투성이가 나였으니.
그럼에도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나였으니.
여지껏은 제멋대로 설치기나 하는 무뢰한으로 치부해 온 바람이었다.
때로는 성가시게 괴롭혀대는 말썽꾼이거나 정신 수란하게 만드는 장난꾸러기 정도로 매도해 버린 바람이었다.
그러나 바람을 준비해 둔 까닭이며 나를 흔들어 깨운 손길이 누구였는지 이제는 안다.
바람이 거칠게 불고난 이튿날 아침
꺾인 채 떨구어진 지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삭정이도 있지만 생가지 찢긴 것도 적잖았다.
그토록 사정없이 모질게 흔들고 털어서 견디지 못하는 것, 버려야 할 것들, 미리 정리해 버리는 엄숙한 의식을 치른 나무들.
간밤 바람 그토록 심하게 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삼월 깊어지면 다시 섭리의 손길이 술렁대는 바람을 숲에 일으킬 것이다.
다들 이제 그만 겨울잠에서 일어나라고.
부지런히 어서 물을 퍼올리라고.
정중동!
그리하여 가지마다 푸른 봄눈, 연연한 꽃눈을 틔우게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