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
왠지 공원이란 이름이 붙기에는 황량한 느낌부터 와닿는 곳이 망우공원이었다.
공원은 여러 사람이 쉴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쾌적하고 아름다운 장소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여긴 망우리 공동묘지가 떠오르는 내 선입감 때문인지 도무지 포근하고 안락한 공원의 이미지가 안겨 오질 앉았다. 실제로는 임진왜란 때 누구보다 먼저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곽재우 장군의 호로 지은 공원명이건만. 홍의장군 곽재우는 대구 현풍이 본관이기도 하고 의령에서 왜군의 수송선을 낙동강에 수장시키며 크게 활약한 의병장이니 대구 동쪽 관문 공원에 그의 호를 얹은 이유는 타당하다.
다만 갓 조성된 공원이라 아직 자리 잡히지 않아서이리라. 크도 작도 않은 어중간한 소나무가 듬성해 햇살이 내리 꽂히고 잔디조차 잘 다듬어져 있지 않은 산허리 곳곳에 황토 흙먼지만 날리던 곳. 공원이라면 그래도 연인의 손수건 없이 맘 놓고 앉을 수 있는 풀밭쯤 당연하고 산책로에는 시야가 문득문득 가려지는 숲과 전망 탁 트인 멋진 풍경을 지닐 법하니까.
주변은 온통 야산 개간한 과원이 농약 냄새를 풍겨댔고 널찍한 고속도로가 소음과 함께 바짝 붙어 있었다. 거기에다 소박한 자연경관과의 조화를 거부하는 영남 제일루. 우뚝 선 그 기상이 차라리 억지스럽기조차 했다.
망우공원 그 자체보다 오히려 아름다운 건 여기서 조망해 보는 비슬산과 금호강이리라. 멀리 보랏빛으로 아물거리는 의젓한 산세. 거기 질세라 유연한 가락 되어 흐르는 물줄기. 비록 스모그 현상으로 산이 뚜렷치 않지만, 그리고 오수(汚水)로 찌든 물이지만 아직은 거느린 모랫벌 눈부시게 푸르른 강.
부산으로 향하는 대구의 관문쯤에 위치한 망우공원. 조경 공사가 채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라 틀 잡힌 기품보다 이렇듯 엉성한 여백이 많았다. 그것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며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얘기. 해서 나는 먼 훗날의 망우공원을 꿈꾸기로 했다.
숲 그윽하고 알맞은 자리에 바위도 있으며 손 시린 계곡 돌틈엔 가재도 숨어 있는 그런 곳. 봄에는 개나리 철쭉 흐드러지고 가을에는 송림 사이 점점이 불타오르는 단풍의 조화도 기대해 본다. 뿐 아니라 한 줌 푸르름이 그리워 찾아가면 조그마하나 기운찬 폭포수와 바위 이끼에 스민 물방울의 신비도 있어야 하리라. 숲 그늘에는 이끼와 버섯이 솟고 무리 져 피어 있는 들꽃의 향기 역시 있을 터이다.
그러나 공원 본래의 의미를 떠나 난 언제라도 망우공원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반추하게 될 터이다. 그것은 지난해 망우공원에서의 오월 어느 날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지 쓴 채 빛바래가던 또 하나의 내 자아와 해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그날. 큰아이를 따라 간 백일장에서 처음 접한 원고지, 그리고 글과의 인연. 손때 묻은 골동품에 호두 기름 먹이듯 내 삶에 윤기를 보탤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진 그날이 있으므로 망우공원은 나에게 충분히 유의미한 곳이다.
이후 글은 범속한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활력소가 되었으며 자꾸 왜소해지기만 하던 나 자신에게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감히, 정말 감히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시도인가. 두렵고 어려운 마음으로 주저하고 살피는 겸손도 없이 또 생(生)의 깊이를 가늠할 줄 아는 예지도, 올바른 통찰력도 없으면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너무 외람된 일이었다. 전혀 생각할 수 조차 없었던, 그저 생각뿐이었던 글과의 만남. 하여 신(神)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불을 지피게 되었다. 봄비 적셔지는 뜨락의 싱그런 흙내음에조차 전율 같은 감동의 떨림이 전해짐을 어찌 그대로 지나칠 수 있겠는가. 낙서같이 끄적거린 몇 개의 단어가 조립돼 차츰 줄글이 되어갔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뜨거운 충동이기보다 사뭇 좋아서 쓰는 글이었다. 하여 소홀히 흘려버리기 쉬운 생활의 편린들을 새삼 애정 어린 시선으로 건져 올려 다듬어 보기도 했다. 때론 제대로 풀려 나가지 않는 무딘 솜씨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저 꾸준히 써보려는 시도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비록 높은 철학이나 깊은 사상에서 표출된 글은 못 쓸지라도 감정의 카타르시스 역으로 가슴속이 트이는 듯함을 종종 느끼며 써나가는 글. 또한 글을 쓰는 동안만은, 이른 결혼에 따른 구속감과 부자유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교직 자리를 던져버리고 스스로 새장 안에 갇힌 갑갑함과 불편함도 까맣게 잊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얼마나 다행이며 감사한 일인지.... 내게 지워진 삶의 굴레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여유를 지니게 됐다는 것이.
누군가 글 쓴다는 것은 치열한 고통이라 했지만 어쩌면 수필은 아픔 속에서만 태어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여지는 글이라는 김광섭 선생의 말에 솔깃했던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기보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무애의 경지라는 점에 혹한채 쓰고 또 썼다. 그처럼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 무형식의 자유로운 글이다.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문학이라는 금아 선생의 말처럼 나는 아늑하고 잔잔한 행복감으로 글을 쓴다. 아마도 아직은 어떤 경계에 다다르지 못한 설익은 치기에서 연유함이리라.
가슴에 더께진 생활의 티끌과 마음의 응어리들을 씻어주는 투명한 청류(淸流)이며 오욕칠정(五慾七情)에 얽힌 심화를 정화시켜 주는 한줄기 맑은 바람인 글쓰기이다. 공원을 거니는 기분으로 난 언제까지나 글을 찾을 것이고 그 가운데에서 무량히 청정한 심전(心田)을 가꿔나가리라.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