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비 젖은 오월, 비원에 가다

by 무량화

잎잎의 신록 눈부신 오월엔 비원에 가야 한다.

사계절 언제 가도 아름다운 비원이지만 은사 같은 안개비 스미는 날 제격인 비원이다.

거목 들어찬 숲마다 새잎 피는 봄, 숲 그늘 서늘한 여름, 오색으로 물든 가을 단풍만이 아니라 백설에 싸인 겨울 적막감도 명품.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한국의 시크릿 가든이다.

요즘은 후원이라 부르긴 하더라만 후원이라기보다는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정원, 비원이 더 알맞겠다.

창덕궁 북쪽 골짜기에 조성된 조선시대 궁중 정원으로 원래는 임금의 산책지였다.

울창한 숲속 네 골짜기에 부용지, 애연지, 관람지, 옥류천 다듬어 가꾸고 적절한 위치에 정자나 누각 올렸다.

비원 숲 가장 깊은 자리에는 반가 형식의 부연 한옥인 연경당이 덩실하게 서있다.


비원의 백미는 부용지와 부용당이다.

오월 내리 비가 내려서인지 부용지 물은 탁하지만 오연한 멋은 여전하다.

연못 꾸며 섬 하나 두고 자욱한 연꽃 완상하며 뱃놀이 즐긴 풍류, 그렇다고 호사 취미만 누린 건 아니다.

맞은편에 정조임금다운 아주 특기할만한 건축물을 마련했다.


높직이 선 이층 건물 주합루는 서책을 보관하던 왕실 서고이자 팔도의 인재를 모아 정책을 개발한 규장각이다.

정조대에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주기관으로 임금인 정조는 특별히 이 장소를 귀히 여겼다.

당시 정약용, 박제가, 이덕무 등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 정조를 보필하며 경세를 논하던 곳이다.

죽림정사를 본뜬 듯 왕이 자주 납시던 곳임에도 담장은 대나무를 둘러 '취병' 이란 운치 있는 이름을 내렸다.

정면 출입구인 대문은 하나가 아니라 세 개씩이나 나란히 서있다.

어수문(魚水門)이란 현판이 달린 중앙 문은 왕의 출입문으로 지붕은 높고 화려하며 양옆으로 낮은 문이 둘, 신하들이 드나들었다.

등용문의 의미로 청룡 백룡이 조각되었으며 단청 호화스러운 어수문은 물과 고기처럼 임금과 신하 사이의 각별함을 나타냈다고.

부용지 동쪽에 있는 영화당은 궐내의 행사 장소였으며 널찍한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과거가 치러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당 돌층계 앞에는 해시계가 놓여있었다.



금마문을 지나자 또 다른 정원인 애련지와 의두합이 이어지게 된다.

의두합은 궐내에서 유일하게 북향을 한 소박한 건축물로 순조 맏아들 거처였다.

할아버지 정조를 흠모해 현군이 되고자 했으나 요절하고 말았다.

큰 돌판을 통째로 깎아 만든 불로문을 통과하면 무병장수는 예약되었으니, 선경에 든 기분으로 애련지에 닿는다.

연꽃 곱게 핀다는 애련지이나 붓꽃만 가득하고 다만 군자의 성품 닮은 경치라는 소문대로 조촐하니 참 소박하다.

애련지를 지나면 연경당 솟을대문이 기다린다.



반가인 사대부집 건축양식을 살려 지은 품격 있는 한옥은 일절 단청을 하지 않았다.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로 꾸며져 있는 만치 정원이며 창틀까지, 전체적으로 아취 그윽한 한옥이다.

특히 널찍하니 쾌적한 공간 배치에다 앞뒤 창을 열면 눈맛 그지없이 시원한 풍경을 연출해낸다.

창덕궁 경내의 낙선재와 함께 몇 시간이고 누마루에 걸터앉아 있고 싶게 하는 연경당이다.



비원의 세 번째 정원인 관람지와 존덕정, 계곡을 휘감아 도는 물길 이용해 자연스레 연못을 조성하였다.

여기서 줄배를 띄우고 왕족들은 풍류놀이를 했다는데 연못이래야 겨우 손바닥 정도 규모다.

시대가 좋아져 왕가의 후원에 들어와 한껏 노닥거리기, 그마저도 몇 시간 노니니 슬슬 질린다.

궁궐 내 아직도 돌아볼 곳 도처에 남았는데 이제 그만 나가고 싶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흔전만전하면 물리게 마련이고 그 좋다는 꽃놀이도 종당엔 싫증이 난다.

어서 출구를 찾아야겠다.

마음이 그래서인지 이중 구조의 육각 지붕을 인 묵직한 존덕정은 이름부터가 은근 백성을 압도해온다.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 현판이 유명하다니 슬쩍 곁눈질만 하고 더 붙잡을세라 조르르 내빼버렸다.

그럼에도 가을에 한번 더 들리고 싶은 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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