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중

by 무량화


드디어 아이들이 기다리던 방학이다. 때맞추어 휴가철도 겹치게 되는 한여름. 올여름은 불볕더위며 열대야 따위로 곤욕을 겪지 않았다. 엘니뇨 현상이란 이름의 기상 이변으로 이상 저온이 계속된 까닭이다. 그래도 당연한 연례행사인 양 피서며 휴가 여행 등 명목으로 산과 바다를 찾는 행렬이 길을 메우다시피 했다. 행선지만 다를 뿐 명절 때의 민족 대이동이 재연되는 것이다. 거리를 누비는 건 관광객 아니면 주인이 떨구고 간 애완동물 정도라는 파리의 여름 풍경이 우리나라에도 생김직하다.



쏟아져 나오는 차량의 물결. 엄청난 인파의 범람이다. 그로 인한 교통체증이 대단하다는 보도다. 정체 사정은 고속도로는 물론 간선 도로마저 별 예외는 아니다. 한 시간 거리가 세 시간도 좋고 심하면 다섯 시간도 걸린다. 어디에 선가는 꼬리 문 차들로 꼼짝달싹 못할 극심한 정체 현상에 갇히자 아예 차 밖으로 나와 기타 치며 놀이판 벌이는가 하면 심지어 노상에서 밥 지어먹는 진풍경도 연출되었다 한다.



피서열차니 임시열차 증편이니 해 싸나 막상 기차표 예매하려면 과장 좀 보태 여름이 다 지날 판이다. 그 통에 진작 방학 맞은 딸아이는 안달이 났다. 외가에 가기로 예정된 날에서 벌써 여러 날이 지난 것이다. 전화에 매달려 아무리 눌러대도 여행사고 부산역이고 입석밖에 없다고 한다. 삼일 후나 자리가 생길 거라는 그것도 불확실한 답변.



“팬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데 …” 왜 빨리 안 오느냐며 연신 시외전화를 해대는 외할머니와 이종들이 제 팬이라는 얘기다. 이렇듯 평소 말수 적은 딸아이가 더러 한마디씩 하는 소리에 우리는 파안대소하고 만다. 여식아답게 인형이나 분홍색을 좋아하는 성향도 아닌 데다 수다스레 쫑알대는 성정도 아닌데 희한하게 가끔 차진 개그로 우릴 웃긴다.



중2인 딸아이. 특별한 계획 없이 한껏 한유를 즐김이 좀 마땅찮기는 하다. 남들은 방학 동안 과외공부니 컴퓨터 외에도 수영 기악 등 취미나 특기 살리는 학원 수강에 분주한 나날인데 마냥 느긋이 별유천지에서 노니는 딸아이. 다들 맹렬히 뛰는데, 모두가 눈에 불 켜고 나대는 데 혼자만 뒤처지는 게 아닌가 은근히 걱정되나 저 싫다는 일 강제로 쪼아댈 의사도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 집 아이들은 일면 행복하다.



두 아이 다 학원이라고는 맏이가 태권도장 한 달, 막내의 피아노 교실 한 달이 그 방면 약력의 전부다. 한 달 겨우 채운 그것도 이미 낸 수강료가 아까운 내 성화에 못 이겨 반 억지였다. 보충학습을 위한 학원은 물론이거니와 하물며 과외공부랴. 그렇다고 노세 노세 타령은 아닌데 하여간 자유방임에 가까운 내 식의 교육 방침은 요즘 기류대로라면 비정상에 속하고 어지간히 후진 편이다.



방학은 심신 수련을 위한 기회이자 미진한 과목의 학력 보강에 활용되는 시기이며 하고 싶던 취미 활동을 하는 때라 정의 내린다. 그러나 나는 방학 때 충분히 쉬라고 한다. 엿새의 일 뒤에 일곱째 날은 휴식이 준비되었듯 방학이라도 편히 맘껏 놀아야 할 게 아니냐고 한다. 어쩌면 내가 고수해 온 방식은 전근대적이고 세태에 한참 뒤떨어지는 천상 미개인 꼴이다. 자연주의 표방에 자유방임을 예찬하는 데는 놀라는 측도 있을 정도. 허나 실은 어느 것이 정상이고 정도인지 아직껏 분별이 안 되고 단정키도 어렵다. 교육에 왕도는 없다잖는가. 아무튼 아이들이 뛰어나게 우수한 편도 아니면서 실력 향상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음은 부모의 나태요 직무유기다. 또한 예능 활동에 도통 참여하지 않음은 아이들의 몰취미 내지 무재능의 반증이 아닌가 싶다.



마침내 기차표를 구한 딸아이는 신바람 나서 외가가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그에 앞서 대학 새내기인 큰 애는 유럽에 한 달 일정으로 배낭여행 떠났다. 자신의 새로운 발견이니 성찰의 기회니 활력의 재충전 따위 접어 두고라도 자녀를 강하게 키우고자 하면 홀로 여행을 보내라 했다. 여행만큼 좋은 스승, 값진 공부도 없다지 않는가. 유럽이라는 오랜 역사와 깊은 전통의 너른 세상에 나가 직접 그들의 생활을 보고 배우고 느끼고 한 가지라도 진정한 감명받고 돌아온다면 그로써 충분하니까.



두 아이가 없으니 덩달아 나까지 방학 맞은 기분이다. 학생 신분 지나고 교직을 떠난 이후 방학이란 개념은 나와 상관 없어진 지 오래. 하지만 학교 수업을 쉬든, 주어진 역할의 휴면기이든 방학은 방학이다. 정치 방학이란 말이 간혹 쓰이는 걸 보면 영 틀린 적용은 아니리라. 어쨌든 나도 방학 중이다.



처음엔 좋았다. 홀가분하고 편안한 이 공간 활용을 최대로 하리라. 마음먹고 글도 쓰리라 작정했다. 한데 그게 아니다. 생각만으로 그 여유가 퍽 근사할 줄 알았는데 도무지 사는 것 같지가 않다. 무료하다 못해 나른해지고 아무런 기운이 없다. 허술히 빈 빨랫줄조차 맥 빠지게 한다. 조석 때가 돼도 부엌 들어갈 맛이 안 난다. 아침에 청소하면 온종일 그대로 어지를 일이 없다. 늘 정돈된 상태나 단출한 게 다 괜찮은 건 아닌가 보다. 사다 놓은 과일도 손대고 싶지 않다. 하다못해 찬밥 먹어도 오순도순 어울려야 흥이 나는 법.



산속 빈 절간같이 적막하고 착 가라앉은 채라 집안에 활기라고는 도통 엿보이지 않는다. 원래 분답게 설치는 성품들은 아니었으나 빈자리가 이리 드넓게 휑할 줄이야. 남편은 꽤 심심한 눈치 더니 비디오테이프를 셋씩이나 빌려왔다. 가족 네 명 중 둘이 빠졌는데 완전히 집이 텅 빈 것 같음은 왜일까. 애들 없으면 웃을 일도 없고 무슨 재미로 사냐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상기된다. 더러 성가시게도 여겼던 이런저런 일들이 새록새록 사는 참 맛이라 여겨진다. 문득 애들 장성해서 분가해 다 내보내면 얼마나 허전할까 지레 우울해진다.



밤이 되니 집안은 더 휑댕그렁 하다. 괜스레 애들 방을 기웃거리다 들어가 불을 켠다. 한구석에 아령이 놓인 맏이 방. 컴퓨터 덮개를 열고 손때로 색이 약간 변한 키보드를 실없이 눌러본다. F. ㅂ. Z. "KO">←. ↑. 난해한 암호 같은 부호들에 낯설어하며 그 옆 책장을 연다. 맨 아래 칸에 맏이가 아끼는 음반들이 빼곡하다. 바흐, 멘델스존의 이웃에 칼 뵘의 비엔나 필하모니가 있고 황병기 님의 가야금 작품 침향무에 명징한 수채화 풍의 조지 윈스턴 피아노 솔로 집이 포개있다. 낮은 보륨으로 보케리니의 첼로 협주곡 판을 걸고 딸아이 방에 든다.



돌 위에 앉아 있던 거북이 두 마리가 불빛에 고개를 갸웃댄다. 외가에 가 있는 동안 먹이는 요만큼, 하며 적정 분량을 내 눈앞에다 떠 보이던 막내의 당부 말이 생각나 먹이통을 든다. 그 소리에 거북이는 마치 보채는 아이마냥 네 발을 허우적이며 서로 앞에 나서려고 야단이다. 유리집을 벗어나려 엎어지고 나동그라지며 끊임없이 탈출 시도해 보는, 그래서 이름이 빠삐용과 드가인 청거북 두 마리.



우리가 거두어 주고 보살펴 주는 애정 속에 살아가는 그네들과 아직은 부모 슬하에 깃치고 사는 아이들이 별 뜻 없이 겹쳐진다. 그러나 불과 십 년 안팎이면 각자 사회인으로 성장하여 내가 그랬듯이 부모 울을 벗어나게 될 아이들. 그리하여 낡은 둥지엔 나이 든 부부 벗 되어 단둘이 남으리니.



새끼 새는 날개가 실해지면 보금자리 떠나 새로운 둥우리를 틀게 마련이다. 더 높은 세계 향해, 더 넓은 천지 찾아 나래 짓도 힘차게 비상해 나감이 자연의 질서며 삶의 순서다. 빈 둥지 증후군이란 신경성 병명을 남의 얘기로만 흘려들었는데 나 또한 서서히 대비해야 할 사안이 아닌가.



지금은 방학 중. 단지 잠시 쉬는 기간일 따름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은 빈집 지키기의 예행연습이나 예비기일뿐임이 천만다행 아닌가. 그러나 조금은 처연해진다. 유수 같은 세월을 실감하며 ‘사는 게 별것이라우’ 읊은 한 수행인의 시 제목이 허허로이 떠오른다. 계속되는 궂은 날씨 때문인가.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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