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좁은 문, 데미안, 노인과 바다. 이런 제목들은 너무도 낯익어 스스럼없이 친해진 책들이다.
대부분 학창 시절에 섭렵했을 고전들로, 마치 주어진 숙제처럼 또는 당연한 의무인 양 읽어 낸 명작들.
제대로 이해를 하고 읽었든 대충 보아 넘겼든
하여간 밤 깊도록 날새는 줄 모르고 빠져 든 책 중에는 삼국지도 포함돼 있었다.
그로부터 서른 해가 훨씬 지난 요 근래 들어 다시 삼국지연의를 읽었다.
젊어서는 필히 삼국지를 읽되 나이 들어서는 그 책을 읽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것은 잔꾀에 밝아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함이라니, 아직도 미욱하기 이를 데 없는 나로서는
더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 밝은 지혜와 사려 깊음이므로.
그에 앞서 엄청난 물동량을 투입해 중국에서 제작한 영화 삼국지를 VCR 통해 비디오로 보았다.
세 나라의 융성과 멸망과정에 따른 인간의 꿈과 야망, 의리와 배신이 대하 강물로 넘실거렸다.
장엄하고 거친 산하를 배경으로 웅대 미려하게 펼쳐 나간 중일 합작 시리즈 물 비디오였다.
어지러운 난세에 구름처럼 일었다가 스러지는 숱한 군상들의 이야기가 때로는 통쾌하게 때로는 비감하게 그려진 영상 속의 삼국지.
각 인물의 개성이 잘 부각된 적절한 배역선정에다 적벽대전 등의 화면은 실제감을 갖고 압도해 왔다.
마흔두 개나 되는 비디오를 지루하지 않게 소화해 낼 수 있었음은 삼국지 본래의 탁월한 재미 덕일 것이다.
아울러 드넓은 대륙의 색다르고 화려한 풍물을 눈요깃감 삼아 천하를 종횡으로 치달리며 벌어지는 전투 장면의 넘치는 박진감에 매료된 까닭이리라.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서 가장 뛰어난 문화를 이루어 낸 나라라는 자부심이 남다른 민족.
황하 문명의 발상지로 오천 년 긴 역사를 면면히 이어 온 저력에다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중용을 중시하는 여유 만만한 대륙적 기질이 큰 자산인 사람들.
이렇듯 뿌리 깊은 중화문화의 진면목을 접할 수 있었던 그 비디오를 보고 나서 진한 감동의 여운에 떠밀려 한 번 더 삼국지를 읽어봐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머뭇거림 없이 곧장 그 여세를 몰라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를 읽어 나갔다.
소설책 행간마다에 영상 속의 장면들이 금방 본 양 떠올라 겹쳐졌다.
복사꽃 사태진 언덕에서 맺은 도원결의가 생생히 되살아났고 영용무쌍한 조운의 활약상이 상기도 선연했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 눈 여겨 살펴보고 싶은 부분은 문장으로 표현된 제갈량의 마지막에 관해서였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다뤄진 그의 죽음이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주는 압권 중의 하나로 남겨졌기에.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마찬가지로
내게는 영상 속의 삼국지가 소설보다 오히려 더 큰 감동을 안겨 주었다.
영상매체의 특성이자 장점인 시청각 동원이 가능한 만치 자극이 그만큼 강렬한 때문일까.
내용의 전달 수단이 구체적 수법이라 이해가 용이한 까닭일까.
특히 제갈량의 사후 의식 등은 영상언어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비장미의 극치였다.
화면 가득 분분히 날리는 흰 종이. 하얗게 나부끼는 무수한 만장.
온 백성이 하나같이 흰옷 입고 엎드려 하늘의 박정함에 땅을 치며 호곡한다.
창천이여! 왜 서둘러 그를 데러 가셨나이까. 대지여! 왜 그를 서둘러 품에 안으셨나이까.
화면의 자막조차 목이 메었고 비디오를 보던 나도 그 속에 빨려 들어가 흐느끼고 말았다.
삼국이 다투던 격동의 시대, 영욕이 점철된 세월을 살다 간 영웅호걸이 많고 많았다.
조자룡도 관우도 내가 흠모해마지 않는 불멸의 이름이긴 하나 제갈량의 죽음만큼 안타깝고 아쉬운 죽음이 또 어디 있으랴.
그가 뛰어난 지략과 높은 인품을 갖춘 사람이며 충의의 인물이라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선왕인 유비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일신 돌보기 앞서 북벌에 나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쉽고도 아까운 죽음을 맞이했음에 더욱 그러하다.
어리석은 금상을 보살펴 받들며 힘을 다해 중원을 되찾고 한실을 일으키려 했으나 오장원의 황량한 진지에서 마침내 별이 지듯 그는 스러졌다.
향년 54세인 그때가 234년.
서양에서는 로마제국이 한창 힘을 떨치던 시절이고
우리나라는 백제 고이왕이 즉위한 해가 된다.
새삼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함과 마찬가지로 역사연대표를 찾아가며 먼 옛적 그가 살았던 세월들을 헤아려 봄 또한 부질없는 일.
허나 후대의 한 사람이 그에게 바치는 사모의 정이 어떠한지, 얼마나 열렬한 팬이 되어 있는지 고백을 해야겠기에.
한마디로 요즘 연예계 스타나 유명 운동선수에 몰두하는 젊은 애들과는 오롯함에 있어 비교가 안 된다.
신기막측했던 전술가로서의 재주보다 나를 한층 감격시킨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한 왕실을 섬기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의리와 지조의 고결함이다.
한점 사심 없는 우국충정이 담긴 글 출사표(出師表)가 나타내듯, 그야말로 지극지성인 충절이며 변함없는 일편단심 앞에 요새 세상의 허망하기 짝이 없는 관계의 다짐과 약속의 말들이 대비되기도 한다.
쉽게 갈라서(내적 고뇌야 치열했겠지만) 남이 되고 마는 부부, 자식에게조차 무책임한 부모, 이해득실에 따라 돌아서는 친구사이에다
지조 없이 이합집산 거듭하는 정치권의 작태까지 서글프도록 한심한 세태인 탓에 그가 더 돋보이는 것일까.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등 인기인에게 열광하며 환호 보내는 청소년들처럼, 나도 그 이름 부르면서 발을 구르고 싶은 뜻밖의 열정을 느끼곤 슬몃 웃는다. 1997